
♧ 무명천 할머니의 봄 - 양순진
하얗게 그을린 슬픔 감싸안은 채
살려고 하지도 못하고
죽으려 하지도 못하고
한 방에 날아가 버린 턱은
한 방에 날아가 버린 봄꿈처럼
풍랑 이는 월령 바다 떠돌다가
어둠이 가득찬 집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바람이 떠밀면
바람의 중력에 못 이겨 콕 박혀
또 몇 밤 떨면서 나오지 못하던
한립읍 월령리 집터
지우려고 지우려고 애쓰던
찢겨진 시간
덮으려고 덮으려고
둘러맨 몇 겹 무명천
저 빈 집 울타리
노란 선인장으로 피었네
온 몸 가시로 투항하며 버티던
슬픈 생애
알알이 붉은 열매로 맺혔네
모래기 할망
진아영 할망으로 불리다가
역사의 증인으로 방방곡곡
노란 물 붉은 물 들이는
우리의 무명천 할머니
눈 감아도 귀 막아도
봄이 와도 잊혀지지 않는다

♧ 아기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 – 양영길
아기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
느네가 어떵 아느니
ᄉᆞ태 때 아기 아방
아척마다 불려강
꿇어앉앙 매맞곡 ᄇᆞᆲ히곡 ᄒᆞᆯ 때
나 ᄇᆞᆨᄇᆞᆨ 털어가민 아긴 울젠 ᄒᆞ곡
아기 울민 큰일 나카부덴 입 막아불민
아긴 숨 막히언 기절허여 불곡
경ᄒᆞ영 집이 오민 아긴 젖 ᄈᆞᆯ지 아니ᄒᆞ곡
어떵어떵 달래영 아기가 젖 ᄈᆞᆯ젠 ᄒᆞ민
어멍 젖 안 나오곡
아기도 울곡
어멍도 울곡
그 아기 나 손으로 죽인 거여
그 아기 어떵 땅에 묻을 말고
어멍 잘못 만나 죽은 아기
어떵 땅에 묻을 말고
어디 강 묻을 말고
어떵 묻을 말고
어떵 묻을 말고

♧ 키 커부난 - 오승국
청춘의 나이가 죄가 되어
한시 하루 죽음의 두려움에 떨었네
물찻 말찻 산란이오름 골짝 골짜기에
짐승처럼 숨어살다 봄 햇살이 들 때쯤
하얀 천 깃발 들고 눈물로 하산했주
젊은 청년들 잡아들여 주정공장 가둬두고
별별 고생 다 시킨 후
열여덟 살 이상 한 줄로 집합시키난
영식이 삼춘은 그 나이가 되어도
키가 한 발밖에 안 되언
열일곱이엔 허연 살아났고
앞동네 춘식이 형은 열일곱이라도
홀쭉허게 커부난 폭도질 했댄 허영
육지감옥소로 실러부렀주
까마귀 울음소리 가득한
사멸의 시적이었네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이던
아, 피바람 선연한 4․3북새통 그때

♧ 금자삼촌 – 이애자
젖먹이 들쳐 업고 북촌을 향한 걸음
넋 나간 어머니의 손힘에 이끌린
여섯 살 그 어린 것이 울 수조차 없었다
얼떨결 외삼촌 따라 경찰이 된 아버지
목에 닻이 감기고 팔다리 묵인 채
바다에 수장 됐다가 보름만에 떠올라
새파란 나이 데려가기 안 되었을까
봄 햇살 한 벌로 따뜻이 염을 끝내고
하얗게 이승을 지우는 광목천 한 겹
독해져야 산다는 외할머니 채근에도
딸의 입학통지서를 보고서야 번쩍 정신 든
어머니 바느질 하나로 써 내려간 마흔 해
폭도니 토벌대니 방화니 학살이니
섬을 함구하던 사월의 어휘들이 풀려도
가슴에 피는 동백꽃은 왜 뜨겁고 시릴까

♧ 두 소년 – 이종형
그러니까 이것은 질문들
아직 죽지 않고 다만
그해 겨울에 사라져 투명해져 버린 질문들
이름이 같은 두 소년이 있었다
같은 이름이 두 번 호명된
무자년 그 겨울에
투명 망토를 입은 듯 집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누가 가슴에 총구를 겨눴나
왜 잡아갔고
왜 돌려보내지 않았나
살았나 죽었나
그러니까 이것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질문들
명림로 430번지 행방불명인 묘역에 가면
고작 열다섯, 열일곱이었던
같은 이름을 새긴 두 소년의 비석이 서 있고
나는 계절마다 같은 안부를 두 번씩 묻는다
강보환 그리고
강보환
소년인 채로 늙어가는 너는 지금 어디에 있나
그러니까 이것은 질문들
끊임없이 이어지는 질문들
쉬잇, 네가 아니면 대답할 수 없는
쉬잇, 너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쉬잇, 1948년 그 겨울에

♧ 달그락, 봄 - 장영춘
기다린 당신의 봄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 겨울 골목길에 발소리도 낮추며
살아서 돌아오리라 등 떠밀던 아버지
발목 빠진 계절 앞에
당신은 오지 않고
무작정 찾아든 숲, 생과 사 경계에서
풀뿌리 근성으로 견딘 발자국이 뜨겁다
꽁꽁 언 낮과 밤
봉인된 시간을 풀며
달그락 숟가락 소리, 얼음장 녹는 소리
드디어 재회를 꿈꾸는 얼음새꽃 떨리는 손
* 제주4․3 73주년 추념시집 『거기, 꽃 피었습니까』(한그루, 2021)에서
* 사진 : 찾아가는 현장 예술제 '봉인' 중 국악연희단 하나아트의 연기(2022. 4. 9. 다랑쉬굴 주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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