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의 말
내 안의
나를
일으켜 세우는
불꽃이여
닿을 수 없어
더
닿고픈
그대여
2022년 3월
김혜천
♧ 첫 문장을 비문으로 적는다
몽중에 나에게 온 이 문장은
선사시대를 헤엄쳐 온
해독되지 못한 아사 직전의 물고기
붉은 통점痛點이 파닥파닥 잠을 깨운다
멈춰버린 농담처럼 행간 속에 가둔 비명의 날들
비늘처럼 달라붙은 남루를 벗긴다
쓰나미 잠들고
산란의 바다를 만날 때까지
그늘마다 검은꽃이 무성하게 피었다
뻘밭에 꼼지작거리는 난해한 기호들
검은꽃의 재해석은 묻어두기로 한다
낮을 되찾고 싶던
긴 밤의 서사를 비문으로 적는다
이제 거침없이
심해를 헤엄칠 수 있겠다
♧ 몽상가의 턱
인사동 골목길을 걷다가
고미술품 노점상에서 오른쪽 무릎을 세우고 무릎 위에 두 손을 모아 비스듬히 턱을 괸 몽중사유상을 모셔왔다
몽상은 오직 한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는 뇌에 자극을 주어 유연하게 한다 굳어버린 일상 속에서 저 아래 먹이를 낚아채는 매의 세계를 보게 한다
간단없이 밀려오는 파도를 넘어
내 창에 걸터앉은 그대여
나를 바람 되게 하여
산을 날게 하고
바다를 걷게 하고
달을 베어 먹게 하고
꽃 이파리와 입맞춤하게 하고
고뇌하고 절망하였다가
다시 살아
시공을 넘나들게 하여
새로운 우주를 도모하게 하면서
몽夢 중에도 찾아와
내 영혼을 깨우는 그대여
나 이제 사는 날까지
그대 맞는 마중물
자리끼 놓아두려오
♧ 불씨
울음새꽃 이파리 한 잎 말갛다
새의 날갯짓이 공기방울을 떨구는
오카리나 선율의 아침
길길이 날뛰고 으르렁대는 먼 바다를 헤쳐 온
난자의 란卵과 난 막膜사이
씨앗 하나 깃든다
갯바위 정수리 주름과 주름 사이로 분사된
괭이갈매기 배설물
우연한 마주침은 또 하나의 주름을 만든다
꽃받침을 제치고 돋아나는 꽃잎
꽃잎 위에 꽃잎을 얹는 꽃잎
물질의 바닥에서 미로를 헤엄쳐
정신의 꼭짓점으로 날아오른다
원뿔이 넓은 밑면을 가질수록
높아지는 꼭짓점
헌 누더기 벗어던지고
새로 태어난 자여
날아오르라
카오스모스의 세계 속으로
♧ 슬랙라이너
안드로메다에 밧줄을 건다
땅 위에서 몸을 띄워 줄 위에 선다
발아래는 눈 덮인 천길 크레바스
그대로가 하나의 커다란 관棺
쉼표의 낙하와 마침표의 장애물
현기증으로 흔들리는 날카로운 모서리에 선다
보이는 건 이름 없는 투명한 눈
아득한 유有, 무無의 바다
백색은 네가 아니다
색채는 밖에 있고 너는 내 안에 있다
눈을 감아야 보이는 너의 눈동자
빛의 명암을 제어해야 만날 수 있는 너
광활한 영토에 색을 품어 가는 길이다
상상의 줄에서 한순간도 내려올 수 없는
고도에서 흘러내리는 별빛을 받아 적어야 하는
♧ 니체의 아이
아이가 사막을 걸어간다, 바람을 타고
열풍이 쓰다만 행간에
여기저기 나뒹구는 해골들, 불립문자다
주검을 빠져나간 웅웅거림이 귓가에 맴돌고
빤히 올려다보는 움푹 팬 동공
적막으로 쓰는 슬픈 서사
사막은 별이 되지 못한 무수한 알갱이
수억 광년 바람이 접는 주름
a와 c에 어떤 값을 넣을까
선택의 자율은 주름이 지닌 탄력이다
마지막 여름이 될지 모르는 낙타
그에겐 선택지가 없다
타들어 가는 발바닥
헐떡이는 숨소리가 거세질 뿐
설산을 바라보는 사자의 용맹으로는
건기의 사막을 건널 수 있을까
돌아오지 못하는 길이어서 더 이끌리는
타클라마칸 지도는 이미
사라져 간 모나드에 저장되어 있다
아이가 사막을 걸어간다, 춤을 추면서
*김혜천 시집 『첫 문장을 비문으로 적는다』(시산맥, 2022)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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