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김영기 시조집 '갈무리 하는 하루'(4)와 잠자리난초

김창집 2022. 7. 26. 00:06

 

신화의 느낌표

 

한라산 용암 속에

용해된 역사인가

알 수 없는 몇 만 세월

침묵이 미덕인 듯

 

신화의 느낌표로 남은 모흥굴 돌하르방

 

돌을 쪼고 깎아낸

파편들의 불립문자

주호인지 영주인지

의문부호 그 어디쯤

탐라의 여명을 열고 자취 감춘 삼신이여

 

말을 걸면 말을 할 듯 말 듯

그를 닮은 미소까지

그 날의 하늘 아래

먼 옛날을 추억하는

 

성주의 화신이신가, 삼성사 돌하르방.

 

 

 

환해장성

 

쇠똥구리 습성이듯

굴러 모아 쌓은 돌성

성난 파도 외적처럼 민초의 등 적시던 곳

무너져 맥이 끊기니

원담마저 흔적 없다

 

물새들이 대신 나서

성채 지킨 자리마다

이 빠져 듬성듬성 시린 입술 사이사이

순비기 아린 향기가

청상인 듯 겨웁다

 

상처를 아물리며

꿈틀대는 흑룡만리

600년 긴 꿈 깨어 이제 비상하려는가

해무 속 돌비늘에도

인관이 번득인다.

 

 

 

마라도 어렝이*

 

너른 바다 한 귀퉁이 무주택 저 어렝이

 

사글세도 못 치러 어디로 쫓겨나나

 

말뿐인 청정특구엔 설자리 잃은 게지

 

다금바리 쌍 걸이, 축에 끼려 바둥이며

 

어디서 내장을 발기고 속내를 보이셨나

 

떨이에 떨리는 외침 곡비처럼 들린다

 

애당초 어시장을 꿈꾸는 게 아니었죠

 

들러리도 서지 못해 날 세운 대거리에

 

또 누가 꼬드겨댔나 회귀하는 어렝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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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렝이 : 놀래기의 제주어

 

 

 

은박지 그림

 

오늘만은 기필코 중섭을 만나서

배고픈 피난살이

깅이*로 연명하고

영혼을 은지에 올린 그 내력을 듣고 싶다

 

화첩 한 번 본 적 없는 문외한인 나도

연서의 파지만큼

은질르 긁다 보면

홰뿔에 대거리하는 흰 소를 볼 것인가

 

허기에 신기 들어 데생이 춤을 추듯

그려낸 은지화는

보릿고개 전러 되어

망막의 그림으로 뜬다, 소젖 물고 노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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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깅이 : 풀게의 제주어.

*소젖 물고 노는 게들 : 이중섭의 그림.

 

 

 

합장하는 나비려니

 

사람이 곧 하늘이다노란 깃발* 꽂은 곳에

 

오방위 중심 자리 포란형의 절 한 채

 

날아 온 만들레조차 꽃 피우니 소곳한데

 

샛바람 불 때마다 깃발은 왜 목 메이나

 

풍경에 잦아든 개벽의 아우성을

 

한울님 울고 계신가, 산새마저 우짖는다

 

둥근 천지 하나인데 두 동강난 우리 사이

 

내 마음 날개 접어 합장하는 나비려니

 

설익은 민초 가슴을 귤빛으로 익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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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깃발 : 수운교의 깃발.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를 교조로 함. 제주시 수운공원 내에 있음.

 

 

                      * 김영기 시조집 갈무리하는 하루(나우, 2010)에서

                                               * 사진 : 잠자리난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