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화의 느낌표
한라산 용암 속에
용해된 역사인가
알 수 없는 몇 만 세월
침묵이 미덕인 듯
신화의 느낌표로 남은 모흥굴 돌하르방
돌을 쪼고 깎아낸
파편들의 불립문자
주호인지 영주인지
의문부호 그 어디쯤
탐라의 여명을 열고 자취 감춘 삼신이여
말을 걸면 말을 할 듯 말 듯
그를 닮은 미소까지
그 날의 하늘 아래
먼 옛날을 추억하는
성주의 화신이신가, 삼성사 돌하르방.
♧ 환해장성
쇠똥구리 습성이듯
굴러 모아 쌓은 돌성
성난 파도 외적처럼 민초의 등 적시던 곳
무너져 맥이 끊기니
원담마저 흔적 없다
물새들이 대신 나서
성채 지킨 자리마다
이 빠져 듬성듬성 시린 입술 사이사이
순비기 아린 향기가
청상인 듯 겨웁다
상처를 아물리며
꿈틀대는 흑룡만리
600년 긴 꿈 깨어 이제 비상하려는가
해무 속 돌비늘에도
인관이 번득인다.
♧ 마라도 어렝이*
너른 바다 한 귀퉁이 무주택 저 어렝이
사글세도 못 치러 어디로 쫓겨나나
말뿐인 청정특구엔 설자리 잃은 게지
다금바리 쌍 걸이, 축에 끼려 바둥이며
어디서 내장을 발기고 속내를 보이셨나
떨이에 떨리는 외침 곡비처럼 들린다
애당초 어시장을 꿈꾸는 게 아니었죠
들러리도 서지 못해 날 세운 대거리에
또 누가 꼬드겨댔나 회귀하는 어렝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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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렝이 : 놀래기의 제주어
♧ 은박지 그림
오늘만은 기필코 중섭을 만나서
배고픈 피난살이
깅이*로 연명하고
영혼을 은지에 올린 그 내력을 듣고 싶다
화첩 한 번 본 적 없는 문외한인 나도
연서의 파지만큼
은질르 긁다 보면
홰뿔에 대거리하는 흰 소를 볼 것인가
허기에 신기 들어 데생이 춤을 추듯
그려낸 은지화는
보릿고개 전ㅅ러 되어
망막의 그림으로 뜬다, 소젖 물고 노는 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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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깅이 : 풀게의 제주어.
*소젖 물고 노는 게들 : 이중섭의 그림.
♧ 합장하는 나비려니
‘사람이 곧 하늘이다’ 노란 깃발* 꽂은 곳에
오방위 중심 자리 포란형의 절 한 채
날아 온 만들레조차 꽃 피우니 소곳한데
샛바람 불 때마다 깃발은 왜 목 메이나
풍경에 잦아든 개벽의 아우성을
한울님 울고 계신가, 산새마저 우짖는다
둥근 천지 하나인데 두 동강난 우리 사이
내 마음 날개 접어 합장하는 나비려니
설익은 민초 가슴을 귤빛으로 익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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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깃발 : 수운교의 깃발.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를 교조로 함. 제주시 수운공원 내에 있음.
* 김영기 시조집 『갈무리하는 하루』(나우, 2010)에서
* 사진 : 잠자리난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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