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들의 전언* – 허영선
여기에 인간이 있었다 삶이 있었다
우리는 죽은 자들, 죽었으나 죽지 않았다
우리는 캄캄한 굴속 연기에 갇혀 연기에 떠도는 자들
사라지지 않는 자들이다
우리는 다만 살기 위해 깊이 들었을 뿐
마지막 숨이 막힐 때까지 서로를 놓지 않았다
엄마는 한 줄기 숨을 아이에게 주었고,
연기의 소리가 인간에게 닿기를 기다렸다
부디, 우리를 기억해주기 바란다
우리의 그날이 당신들의 존엄이기를
희망이기를, 평화이기를 바란다
당신의 그 자리, 서럽도록 아름다운 다랑쉬의 명예를
지켜주기 바란다
이제 우리는 두려움 없는 파도가 되었다
당신들은 우리가 그토록 찾던 봄이다
그대, 그러니 더 이상 슬퍼하지 말기를
이것이 우리들의 전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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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랑쉬굴 방사탑의 비문.
♧ 다랑쉬굴 – 강덕환
얼마나 많은 필설이
그대의 형용을 가능케 하랴
썩어 문드러진 육신 틈새로
숨죽여 지내온 세월이 무심히 흐를 때
뼈마디에 스민 한(恨)
차곡차곡 채워두었다가
말보다 진한 침묵으로 다가서던
저 울림
다랑쉬오름 햇빛 피한 선수머셋굴
종달리에서 상․하도리에서
이름 다르고 나이 달라도
언 손 품속에서 녹여주던
순경, 순환, 두만, 봉관, 명입, 태원, 달룡이
그리고 석순, 성만, 순녀 아지망과
이름 석 자 매달아 주지 못한 그 아들
무자년 동짓달 열 여드렛날
“움직이는 것은 모두 죽여라”
빗질작전이 삶터에 들이닥쳐
짚불 연기 스멀스멀 지펴놓을 때
입속으로 콧속으로 눈 속으로 스며들어
온몸은 파르르 경련에 떨고
살려줍서 살려줍서, 울부짖을 새도 없이
저것 봐라 동굴 바닥
한 귀퉁이에 새겨놓아 전하고자 했던
역사증언의 몸부림
마흔네 해였다네
술 한 잔 흩뿌리며 찾아 나설 때
어둠 속에 용해되지 않고
끝끝내 마그마로 흐르다가
눈을 찌르며 달려와
화산으로 분출하던
열한 구의 주검들
웅얼웅얼 주며 받고 있었다
옆 사람이 그 옆 사람에게
신발이 혁대에게
숟가락이 솥에게
서로의 이름을 부르다 보면
어느새 다랑쉬오름
굼부리만큼 넓은 마음 나눠 갖던 날들
동토의 공화국에 탯줄 받고 자란 탓에
바람 쓸리는 곳 피한
칠흑의 동굴 속
웅크린 만큼
바깥세상 그리는 꿈도 버리지 않았다
살 맛 나는 시절 오기만 해봐라
일곱 살배기 어린 것 앞장세우고
덜래덜래 고향집 찾아갈 거다
울담으로 식게 떡 나눠 먹던
이웃들도 만나볼 거다
아하, 제상 받아 앉은 자리에서
산담 두른 봉분에서
목줄 돋워 당당하게 말하자던
악독한 시절의 못다 한 이야긴
한 줌 재도 추스르지 못해
제주바다 푸른 물살에
혼백으로 떠다니더니
기어코 붙잡아 오르는구나
탄탄한 밧줄 질끈 잡고
분단조국을 넘는
구름으로 바람으로 솟구치는구나
썩어 밑거름 자양분 삼아
뿌리를 뻗고 가지를 드리워
너 나 없는 세상의 빛살로
이제야 뚜벅뚜벅 걸어오는구나
♧ 다랑쉬굴에서 부는 바람 – 강봉수
큰다랑쉬 밑 아기다랑쉬에 올라서면
손에 잡힐 듯 바라다 보이는 종달바당
바람이 불면 흔들리는 초가집
파도 물결이 코에 맺히고 이마에 젖는다
난리 통에 떠나온 집
두고 온 어멍 아방
재수랑 동갑내기 동생도 잘 있는지
바람이 부는 날이면 대숲이 운다
불 칸 마을 사람들 모두 떠나 없는데
바람만 불면 대숲에선 사람 소리 술렁이네
차르르 휘 휘 셔, 서~어
대나무가 어깨를 걸고 말을 전하네
용눈이가 보았네
손지도 보았네
달품은 오름도 다 보았네
궤 소곱에 불 짇엉 열한 사름 목숨 좀은 일을
아기다랑쉬에 올라서면 보이네
그리운 고향바당 초가집이
큰다랑쉬에 걸린 어멍 얼굴도
다랑쉬굴에서 얼굴 내밀면
*계간 『제주작가』 2022년 여름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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