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이윤승 시집 '사랑이거나 다른 종이거나'의 시(4)와 붉은사철란

김창집 2022. 8. 2. 00:06

 

들꽃

 

 

온 들녘에 제멋대로 뿌리내리고 꽃을 피우는 풀들

 

비록 무분별해 보이지만

 

그것은,

 

내가 지상에서 본 가장 아름다운 질서였다

 

 

 

모란

 

 

오월이

모란꽃 송이송이 호명하고 있다

 

햇살 가득한 정오

나는 배경이 된 초록을 읽다가 자주 아득해진다

누구일까

 

미타전 앞

몇 생을 건너왔는지 알 수 없는

아린, 천 년 전 사랑 같은

붉은 꽃잎 앞에 두고

 

무채색이 된 나의 무늬

열세 살 초경처럼 붉어지는데

 

두고 온

겹겹의 꽃잎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가면

화엄의 길 하나 거기 있을까

 

지상이 아름다운 이유를

간혹 잊고 지낼 때가 있다

 

 

 

고백

 

 

참 추하게 살았습니다.”라는

어느 시인의 고백을 들었습니다

 

부끄럽습니다

나는 추한 줄도 모르고 살았습니다

 

 

 

 

정선으로 간 여자

 

 

절집에서 할머니가 된 정선아리랑 같은

나보다 스무 살이 많은 그녀가

고향 정선으로 돌아갔다

 

가끔은 분홍색 달이 떴으면 좋겠다고

상상의 나래를 펴곤 했던

열일곱 소녀 같은 그녀가

 

풀고 있는 추억의 끈을 따라가면

희미해진 낮달 같은 지난날이 엊그제 일처럼 새로워져

분홍색 빛나는 저녁이 된다

 

있지, 나는 그 남쪽 섬이 제일 좋았어

달빛 속에 갇힌 구계등 밤바다

파도 소리 아득히 들려온다

우리는 다시 그 시간으로 돌아갈 수 없어서

 

수평선 너머 아득한 곳에서

지나간 것들이 손을 흔든다, 안녕

 

가끔씩 정선으로 전화를 한다

그녀에게 감염된 분홍의 바이러스로

나는 또 몇 날을 멧새처럼 포롱포롱 날아갈 것이다

 

 

 

노란 소국

 

 

지난겨울 쓰레기통 옆에 버려진 화분 속 마른 소국을 꽃밭에 옮겨 심었다.

 

어느 날 세상 가장 편안한 모습으로 노란 소국 한 무더기가 피어올랐다.

 

미움도 잊고

마음이 따뜻해졌다.

 

 

                                    * 이윤승 시집 사랑이거나 다른 종이거나(문학의전당, 2022)에서

                                                                     * 사진 : 붉은사철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