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돌하르방
낯선 듯 낯익은 듯 한 번쯤 쳐다본다
한경면 녹차분재로 생각하는 정원 앞에
한 걸음 꿈쩍도 없이 서 있는 돌하르방
시간을 들어 올려 타임머신 타 본다
두 주먹 불끈 쥐고 숨죽인 미소 속엔
흉노족 가는 곳마다 토벌하여 없앤 말씀
세상일 다 알아도 침묵을 배우라네
테두리 부서지는 감정선들 참아내며
현무암 침묵의 말씀 분재목에 싹트네

♧ 함박눈 내리는 날
함박눈 내리는 날 집안 먼지 털어낸다
설레는 첫눈 기념 문득 난 생각이다
그렇지, 첫눈 오는 날 묵은 것들 털자 했지
모든 잘못 뒤집어쓰고 흩어지는 먼지들
공간의 창작인가 시간의 고된 잠인가
내 안에 쌓인 먼지도 슬며시 떨어진다
시간은 아무데나 묻히는 모양이다
내가 잃은 내 시간도 먼지 속에 숨었었다
어머나, 기겁을 하며 흩날리는 과거들
내 안을 닦다 보니 더 오랜 시간 하나
네모난 액자 속에 눈부시게 나타났다
함박눈 두말가웃쯤 쌓여있는 아이들 웃음

♧ 하도리 순비기꽃
하도리 마을회관 흘러나오는 그 노래
나인 듯 나 아닌 듯 체온으로 녹아들고
구십도 꺾인 허리를 땅속에서 펴신 어머니
어떡하다 여기에 와 바닷가에 앉았나요
파도도 어머니와 아주 친한 걸 보니
어머닌 저 세상에서 꽃몸이 되었군요
오늘은 어머니가 이 세상을 밝혔네
바닷가에 핀 채로 빙긋이 웃으시네
팔 벌려 날 안아주듯 아기바람도 품네
새벽녘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던 그 소리
나에게 깨지 말라고 살살살 걷던 기척
어머니, 다시 한 번만 그렇게 해 주세요

♧ 양배추
무언가 감추려고 껴안는 게 아니다
한 잎씩 돋아나는 서러움과 두려움이
안에서 솟구치는 날 감싸고 안았을 뿐
별빛처럼 반짝이는 네 생각 놓칠까봐
아프고 외로워도 그리움 누르면서
긴긴날 포개어 가며 모아놓고 있을 뿐
아니다 그게 아니다 내 맘속에 그 사람
둥그런 얼굴에다 동그란 그 눈동자
그 모습 내 눈에 박혀 그려내고 있다네

♧ 월령리
삭막한 저 바람목 마을길 외진 곳에
맑은 눈물 웃음으로 받쳐 든 선인장
립스틱 노랗게 바르고 애달프게 날 보네
그 자리에 피어난 까닭을 말하는 듯
무명천 마르지 못한 아픔을 가득 품고
윤회의 머나먼 길을 돌아와서 피었네
언덕배기 아래쪽 망망한 제주바다
포구 돌아 달려든 삼성제절* 물보리를
가녀린 손바닥으로 고운 얼굴 가렸었네
소녀는 그 누구도 사랑한 적 없었네
한 번도 사죄의 말 듣지도 못했지만
무자년 오랜 기억으로 월령리를 피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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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제절 : 연거푸 세 번이나 꺾으며 몰려오는 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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