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김신자 시조집 '난바르'의 시조(3)

김창집 2022. 9. 8. 01:02

 

돌하르방

 

 

낯선 듯 낯익은 듯 한 번쯤 쳐다본다

한경면 녹차분재로 생각하는 정원 앞에

한 걸음 꿈쩍도 없이 서 있는 돌하르방

 

시간을 들어 올려 타임머신 타 본다

두 주먹 불끈 쥐고 숨죽인 미소 속엔

흉노족 가는 곳마다 토벌하여 없앤 말씀

 

세상일 다 알아도 침묵을 배우라네

테두리 부서지는 감정선들 참아내며

현무암 침묵의 말씀 분재목에 싹트네

 

 

 

함박눈 내리는 날

 

 

함박눈 내리는 날 집안 먼지 털어낸다

설레는 첫눈 기념 문득 난 생각이다

그렇지, 첫눈 오는 날 묵은 것들 털자 했지

 

모든 잘못 뒤집어쓰고 흩어지는 먼지들

공간의 창작인가 시간의 고된 잠인가

내 안에 쌓인 먼지도 슬며시 떨어진다

 

시간은 아무데나 묻히는 모양이다

내가 잃은 내 시간도 먼지 속에 숨었었다

어머나, 기겁을 하며 흩날리는 과거들

 

내 안을 닦다 보니 더 오랜 시간 하나

네모난 액자 속에 눈부시게 나타났다

함박눈 두말가웃쯤 쌓여있는 아이들 웃음

 

 

 

하도리 순비기꽃

 

 

하도리 마을회관 흘러나오는 그 노래

나인 듯 나 아닌 듯 체온으로 녹아들고

구십도 꺾인 허리를 땅속에서 펴신 어머니

 

어떡하다 여기에 와 바닷가에 앉았나요

파도도 어머니와 아주 친한 걸 보니

어머닌 저 세상에서 꽃몸이 되었군요

 

오늘은 어머니가 이 세상을 밝혔네

바닷가에 핀 채로 빙긋이 웃으시네

팔 벌려 날 안아주듯 아기바람도 품네

 

새벽녘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던 그 소리

나에게 깨지 말라고 살살살 걷던 기척

어머니, 다시 한 번만 그렇게 해 주세요

 

 

 

양배추

 

 

무언가 감추려고 껴안는 게 아니다

한 잎씩 돋아나는 서러움과 두려움이

안에서 솟구치는 날 감싸고 안았을 뿐

 

별빛처럼 반짝이는 네 생각 놓칠까봐

아프고 외로워도 그리움 누르면서

긴긴날 포개어 가며 모아놓고 있을 뿐

 

아니다 그게 아니다 내 맘속에 그 사람

둥그런 얼굴에다 동그란 그 눈동자

그 모습 내 눈에 박혀 그려내고 있다네

 

 

 

월령리

 

 

삭막한 저 바람목 마을길 외진 곳에

맑은 눈물 웃음으로 받쳐 든 선인장

립스틱 노랗게 바르고 애달프게 날 보네

 

그 자리에 피어난 까닭을 말하는 듯

무명천 마르지 못한 아픔을 가득 품고

윤회의 머나먼 길을 돌아와서 피었네

 

언덕배기 아래쪽 망망한 제주바다

포구 돌아 달려든 삼성제절* 물보리를

가녀린 손바닥으로 고운 얼굴 가렸었네

 

소녀는 그 누구도 사랑한 적 없었네

한 번도 사죄의 말 듣지도 못했지만

무자년 오랜 기억으로 월령리를 피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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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제절 : 연거푸 세 번이나 꺾으며 몰려오는 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