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달항아리 - 洪海里
백자대호나 원호라는 명칭은 너무 거창하다
좀 촌스럽고 바보스런 달항아리
우리 어머니가 나를 가졌을 때
넉넉하고 봉긋한 그 배가 아니겠는가
먹을 것 없어 늘 배가 비어 있어도
항아리는 배가 불룩해서 그지없이 충만하다
달이 떠서 밝아도 보름이고
달 없는 칠흑의 밤에도 보름달이다
문갑 위에 놓으면 방 안에도 달이 뜨고
아버지 가슴에도 달빛이 환하다
찬장 위에서 가난을 밝히는 달항아리
그것을 바라다보는 마음마다
이지러졌다 다시 차오르는 달로 뜬다
어린 자식의 응석을 다 받아주고 품어 주는
어머니가 항아리를 안고 계신다
세상사는 일 가끔 속아 주면 어떤가
어수룩하다고 바보가 아니다
어머니가 항아리 속 아버지 곁에 계신다.

♧ 먼지력曆 - 김경숙
먼지는 날짜에서 피어난 부피다
훅 불면 날아오르는 먼지들은 날개들의 반대파이거나 꽃의 대역代役이다 피어오르고 난 뒤엔 반드시 지는 일종이지만 우수수 지지는 않는다 혹자는 가라앉지 못하므로 분한 마음일 수도 있겠다
깃털을 품고 있는 고요한 일습一襲일 것이다 평생 외출해본 적 없는 가구들을 들어내면 숨죽여 살아온 날들이 어깨를 펴고 공중으로 솟구친다 그동안 까맣게 잊고 살았던 시간의 부스러기들이 소리 없이 눈부시다
외면과 방치 사이에 헐거워진 틈, 틈을 털어 내다보면, 놀라 창밖으로 달아나려는 자욱한 방위들, 햇살을 젓는 야윈 헛날갯짓이 반짝이며 뒤엉키다 힘없이 주저앉는다
먼지력, 이보다 더 견고한 달력이 있을까
나무둥치에 번져가는 나이테 같기도 한
바닥을 벗어나려던 절박했던 순간들이
들풀거미 줄같이 소복하다
너무도 헐거워서 날아가는 것조차 잊고 있는 먼지들, 그 시간의 허물이 날개의 부력이다 오래되면 흐릿한 시야가 되고 마는
먼지는 사물이 벗어놓은 날짜다

♧ 칼갈이 노인 – 임채우
카를 갈아요오
가새 갈아요오
대한大寒이 얼어붙어
열릴 줄 모르는 식당 앞에서
미장원 앞에서
인적 없는 골목에서
처량하고 여리게
갈아야 할 것이
칼과 가새뿐이 아니라고
예리하게 벼린 날로
무언가를 긋듯이
카를 갈아요오
가새 갈아요오

♧ 장님 새 - 김세형
길은 아무에게나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자신 안을 오래 들여다본 자에게만 보여준다.
새들은 어떻게 길 없는 길, 하늘길을 날고 있을까?
새 한 마리 길을 잃고 내 안에 갇혀 있다.
그러나 난 내 안에 갇혀 있는 그 새가
길을 잃은 새가 아니라 눈을 잃은 새라는 것을
어젯밤 꿈속에서 눈을 뜨고서야 알았다.
난 눈뜬 장님새로 평생 길을 찾아 헤맸다.
그러나 그 모든 길들은 모두 꿈길이었다.
지금 내 안의 알을 깨고 나온 늦은 새가
젖은 날개를 푸덕이며 비상을 준비하고 있다.
땅에도 하늘에도 길은 없다.
마음에 길이 있다.

♧ 봄을 걷다 - 조성례
몇 날 며칠 창밖을 보며 탈출을 꿈꾼다
그 거리가 몇 만 리인가 재어보는 중
문득 누가 창문을 두드린다
썩은 낙엽 속에서 상사화 푸른 봄의 옷을 입고 있다
창가에 누워있는 나를 일어나보라 한다
땅을 딛고 일어서고 싶은 마음
어찌 저보다 못하랴
온 몸에서
발록발록 봄의 열꽃이 밤을 뒤챈다
두드러기처럼 덜 성숙한 봄을 피워내는 몸이
보조기에 의지해 걸어본다
발바닥에서 절뚝이는 아지랑이
아른아른 피어난다
* 월간『우리詩』 2022년 9월호(통권 411호)에서
* 사진 : 갈라파고스의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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