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정군칠 유고 시선집 '빈방'의 시(3)

김창집 2022. 9. 18. 00:36

 

제주 팽나무

 

 

봄이 오기도 전에 날이 저문다

차고 어두운 방에 전원을 올린다

형광등이 몇 번이고 깜박이는 사이

오라동 언덕배기 보리밭 한가운데

늙은 팽나무를 생각한다

오후의 마지막 햇살까지 안타까이 만지작거리던 가지

,

천수관음의 손들이 허공을 더듬고 있었지

수명이 다한 형광등은 여전히 깜박거리고

그래,

천길만길 어둔 밤의 벼랑이었지

깃을 치던 새들이 놀랄 새도 없이 날개를 꺾고

화염에 휩싸인 집들의 어깨가 힘없이 무너져 내릴 때

, 쩍 흙벽 갈라지는 소리

배고픈 숟가락이 검게 그을리는 소리

탱탱 불은 어미 소의 젖 터지는 소리

의 망막이 터무니없이 들려졌지

감을 수도 뜰 수도 없이 따끔거리는 눈

그 속으로 파고든 소리들의 광시증光視症을 다스려

한기를 뿜어내는 늙은 팽나무 한 그루

푸른 보리밭을 살 가까이 끌어당기던

아름드리 밑둥치 불거진 눈물의 혹,

그 검은 덩어리들

 

 

 

절벽

 

 

모래무덤을,

 

바람이 들고 나던 바위 그늘을,

 

물 속 골짜기마다 무늬를 새겨 넣던 노을을,

 

그림자도 없이 혼자서 판독하고 걸어와

 

펑펑 우는 바다

 

 

 

환청

 

 

매미가 울었지요

여름 이미 지나고

겨울이 바로 턱밑인데

매미가 울었지요

구실잣밤나무 등피에 붙은

매미 한 마리

탈피각으로 속을 다 비워내며

울었지요

기껏해야 그것,

내 몸의 저승으로나

울었지요

 

 

 

달의 난간

 

 

  파도는 부드러운 혀를 가졌으나 이 거친 절벽을 만들었습니다

 

  열이레 가을달로 해안은 마모되어 갑니다 지워지다 이어지고 이어졌다 끊어지는 신엄의 오르막길, 바다와 가장 가까운 벼랑에 이르자 누군가 벗어놓은 운동화 한 켤레 가지런히 놓여있습니다

 

  생의 난간에 이르면 달빛 한 줌의 가벼운 스침에도 긁힌 자국은 선연할 터인데 내 안의 빗금 같은 한 무더기 억새, 바싹 다가온 입술이 마릅니다

 

  생애生涯의 끝에 이르러 멈추었을 걸음 망설임의 흔적인 듯 바위틈에 간신히 붙은 뿌리, 뿌리와는 달리 땅 쪽으로 뻗은 가지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습니다

 

  누군가 온몸으로 지나간 길, 마음 한 번 비틀어 곡을 만들고 마음 다시 비틀어 절을 만들었으나 길 밖을 디뎠을 자의 흔적은 허공뿐입니다

 

  자주 바람 불어 달이 잠시 흔들렸으나 죽음마저 품어버린 바다는 고요합니다

 

 

 

화신花信

 

 

  저 물 위, 새의 가벼운 날개짓을 화신이라 하면 안 되나

  엄동을 저항 없이 견뎌낸 붉은 잇몸인 바다를 회신이라 하면 안 되나 치약을 풀어놓은 듯 알싸한 갯내 가까이 옴팡집들의 부엌마다 풍기는 비린내, 그것 또한 화신이라 하면 안 되나 아침 밥상 앞에 둘러앉아 조근조근 이야기를 나누는 가난한 집 아이들, 그 아이들의 입술처럼 종알거리는 서귀포 앞바다의 섬들, 이 모든 것들이 내미는 푸른 혀를 화신이라 하면 안 되나

 

 

                                  *정군칠 유고 시선집 빈방(고요아침, 201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