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제비꽃
내 생 초라하여라
목숨 한 번 걸어본 적도 없이
그저 밥이나 빌었으니
손발이 신음하며 생계야 꾸렸지만
야수처럼 불온하게 몸 던져 본 적 없으니
빵만으로 사는 게 아니라고
어떻게 감히 이야기하랴
무승부는 싱겁다고
구경꾼처럼 투덜대면서
이념의 전장엔 눈 감고
칼자루 한 번 쥔 적 없이
바스러지는 내 핏줄의 만가
오늘도 고개 숙여
멀어지는 말밥굽 소리
더듬다, 불쑥 일어서는 굴욕의 칼날
기어이 휘두루리라, 불꽃 튀던
한순간은 있었다 전하리니

♧ 낙화 6
쾌락의 비명을
한 줌 흙에 건네는
서늘한 이별식은
낯선 흙더미에서
의욕을 마름하다가
시절을 마저 채우려
떠나는 봄을 붙잡네
햇살 맑은 날
가젤처럼 통통 튀기도 했던
추억의 부스러기들
주름 접어 껴안는
씨앗의 둥지엔
봉긋한 통증이
이슬처럼 서리네

♧ 낮달
늙은 세월이
컹컹 목이 메는
막다른 골목
깨진 가슴으로
스며나는
침묵의 말을
움켜잡고
사랑의 유랑자
바람처럼 흘러온
한 줌의 생
밤의 어둠을 잃고
허공에 담긴 유언
겹겹으로 봉인하고
구름 뒤로
낙관처럼 눌러앉네

♧ 거미
허공으로 투망하는
노련한 흉계여
날아든 생을
한순간에 삼키고
바람 붙잡고 흔들리는
삶의 역설
생명, 사는 일이
먹는 일이라
오물거리는 입이
자꾸 클로즈업되는

♧ 갈구
불잉걸 위에
내 마음 올려놓으면
시벌건 한 줄 문장 태어날까
빙벽에 내 마음 걸쳐 놓으면
또랑또랑한 눈망울로
세상을 읊조릴 수 있을까
내 마음 날개 키워
파란 허공에 걸터앉으면
내 안의 내가 무수히 튀어나와
사막의 낙타도 타고
길 위의 길, 지워진 길을 걷고
알프스의 독수리 불러 모아
썩은 마음 다 뜯어 먹도록
주술도 부르고
그러다가 어둠으로 모여든
모든 나를 내 속에 집어넣고
냉수 한 잔 들이켤 수 있을까
아득히 작아진 내가
개미가 지나는 길 비켜서서
그저 바라보며 멍때릴 수 있을까
*정복언 제2시집 『내게 거는 주술』 (정은출판, 2022)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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