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정복언 시집 '내게 거는 주술'의 시(4)

김창집 2022. 10. 24. 00:12

* 사진 : 요즘의 사람주나무(수채화 효과)

 

동백꽃

 

역사의 굽잇길에서

칼바람을 맞서며

붉은 항변 토해 놓고

 

굽힐 수 없는 이념

목숨보다 귀히 여겨

젊음마저 스스럼없이 떨구는

투혼의 절규

 

4월을 활활 태워

기억 깊숙이 찍어놓는 화인

붉디붉어 천년인들 못 넘으랴

 

피멍의 속울음

산천에 콸콸 뿌릴 때

하늘 향한 길은 여한이 없어

곶자왈에 뿌리박은 깃발

그 심장 소리 쩌렁쩌렁 펄럭이는

 

 

 

문득

 

 

사는 게, 문득

부질없는 놀이만 같아서

붉어지는 눈시울

 

땀을 지고

가파르게 오르던

시절

 

피는 꽃도

고단하다고

온 힘으로 웃던 모습

 

슬픔이 각인되어

굴곡진 길

이제 뒤돌아보네

 

슬픔의 뒤안은 이별

떨군 낙엽도, 내 마음일까

빈 가지 끝에 매달린

눈길 하늘거리네

 

 

 

나 이제는

 

 

이제 묵묵히 기다릴 시간

 

어느 길에서 헤매던 깨달음이거나

새벽에 울던 별빛의 이야기거나

떠난 이웃이 볼에 머물던 웃음이거나

봄에 다가온 목련의 수줍음

이런 것들을 가슴의 갈피에 넣어 두고

 

허공으로 흩어진 가족의 온기를

다시 수습해야 한다

아버지 등에 업힌 지게의 무게이거나

어머니의 주름 잡힌 손매가 낸 김치 맛이거나

, 그 가슴에 묻힌 아들 무덤의 울음이거나

 

잊힐 수 없는 것들을 품어야 한다

 

퇴화한 날개의 추억이거나

고립을 택한 바위섬의 노래이거나

감정의 찌꺼기를 포획한 기도의 눈물이거나

땀으로 익힌 울분이거나

내질러 갈라진 매미의 노래이거나

 

살면서 기억되는 시간의 잔해들도

포근히 감싸고

 

몰풍한 비바람의 횡포를 떨치며

얼음 속의 봄 이야기를 기다려야 한다

묵묵히 기다려야 한다

 

 

 

아내에게

 

 

우리

이제 참 멀리도 왔네요

쫓기듯 내달리다 구르기도 하며

 

양 볼에 복사꽃 피던 시절은

강물이 실어 갔을까요

바람이 낚아챘을까요

 

아들 셋 키우느라

휘고 휜 허리 곧추세우며

무연히 올려다보는 구름 조각들

그대로 흐르라 하네요

 

밤하늘의 별빛

촉촉한 눈망울에 내려앉아

함께 걷는 길 밝히니

애틋하여라, 맞잡은 손

 

막다른 시간을 세공하느라

주름진 얼굴에 쓰인 생의 이력

고이 꺼내 닦고 다듬어

환한 웃음으로 만들어 봐요

 

광채 사위어도 빛나던 삶은

지나온 날 당신의 눈물만 같아라

 

가슴 후비며 하는 말이오

사랑해요, 여보

 

 

 

침묵의 깊이

 

 

바위와 눈 마주치면

넙죽 엎드려 여쭈고 싶네

 

억겁의 세월을 담아 논

이야길 어찌 침묵하는지

 

돌꽃이 아무리 졸라대도

강물처럼 깊어지는 묵묵부답

 

모든 게 언어이니

그대로 보고 들으라고

요지부동 바위는 입을 닫네

 

파란 하늘의 눈짓에도 아랑곳없이

눈감아 생각에 잠기며

침묵의 깊은 맛을 즐길 뿐

 

귀를 여는 건 네 일이라는 듯

 

 

                                     * 정복언 제2시집 내게 거는 주술(정은출판, 2022)에서

                                                 * 사진 : 요즘의 사람주나무(수채화 효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