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잔디
차분히 내려앉은 공기를 안고 팔다리 바닥에
아무렇게 펼쳐 놓았어
떨어질 염려 없어 참 좋아
바르게 누웠어, 등 따뜻해
엎드려 누웠어, 배 따뜻해
이리저리 뒹굴었어 떨어지지 않아,
하늘은 너무 멀어 보이지 않지
낮게 살아 이름 없어도 서로가 서로 안아 주지
물만 먹고 촘촘히 자람세 좋아
어쩌다 내 살 자르면 떼라 이름 부르지
이식한 몸과 몸도 한 몸으로 초록지게 살거든
더운 날은 발밑으로 물을 건네며
감나무 아래 떨어진 홍시 상처 없이 받아 주었어
떨어질 염려 없는 바닥 섬기며 웃고 살아
바닥이 좋아 바닥에 누었어
♧ 사월의 붓질
숲은 잔설 사이로 풀빛 나는 몸을 푼다
나비 잠자던 갓 난 고부랭이* 울음소리에
능선 아래 목초밭이 잠에서 깨어
기지개를 켜면 들녘은 조금 더 자란다
검불 나부랭이 사이로 습습한 안개가 떠나고
봄볕 따스히 스며들어 시린 몸 말리던
아기 뱀,
푸른 메가 부르는 산길 댑싸리 속으로
길 찾아 떠난다
잎이 떨어져 허술해진 망개 발부리에서
바람난 손들 크게 눈 돌리는 산허리
서슬 퍼런 가시덤불
고부랭이 목을 쥔 바람의 손목을 거칠게
찌른다
햇살의 포박을 풀어 끓는 물속에서 잎맥을
녹인다
서서히 풀어지는 갈반의 채색머리 세포 조각
성깃한, 뜨거운 의지 하나 식지 않을 미라로
거듭 나기를 기다린다
---
*고부랭이 : 어린 고사리
♧ 홍조紅潮
하가 어리연꽃 헤집고 손을 담그자 지난밤 뜨거운 별들이 만지다 갔나 물의 몸피에 아직도 부끄러운 홍조가 남아
뜨겁다
♧ 함수*鹹水
수마석 위로 지친 꽃잎들이 떠다닙니다
겨울을 건너며 시린 꼬리 밟다 왔는지
묵은 냄새가 납니다
잎가에 번지는 허물 탓일까,
함수가 닿아 잎살이 쓰려옵니다
너울 넘어온 상처 끝이 물집으로 번집니다
봄볕 해어지도록 분꽃 향기 화려했던 기억들,
핑크빛 볼에 화약처럼 웃음 내지르던
두 보조개,
가파른 길목 어디에서 뜬 구름 잡으려 했는가,
긴 호흡 다잡아 알몸으로 돌아온 묵은 꽃잎들,
간절함을 기대에 매달아 마른 햇살 속으로
나비질하던 시선, 시선들
말아 쥔 지친 하루를 함수에 띄웁니다
삶의 질곡에서 원치 않게 기울어져 가는
씨도리 밑동들,
헐거운 줄기에 지지대 기대어 바람벽 같은
세상을 물질합니다
---
*함수 : 해수 사우나.
♧ 긴장 모드
이러다 내 생 다 가겠어
흐르는 물 거슬러
방부제 녹여 샤워하는 여자
꽃추렴 끝물에
억새꽃 한 무리
출렁이며 이우네
어머!
내가 앞서가나 봐
활짝 핀 봄 한 상 주세요!
* 김정순 시집 『늦은 저녁이면 어때』 (메이킹북스, 2022)에서
* 사진 : 가을 산, 영남알프스(수채화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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