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오름 이야기

'부처님 오신 날'에 오른 성불(成佛)오름

김창집 2002. 12. 10. 15:41

▲ 찔레꽃 핀 비치미오름에서

오늘은 '부처님 오신 날'. 금년 5월은 '어린이 날'과 '부처님 오신 날'이 달력의 붉은 글씨 속으로 숨어버렸다. 다른 해 같으면 5월은 공휴일이 두 번 있어 여유를 부렸는데, 숨막힐 것 같다는 학생들의 푸념이 나올 만도 하다. 그래 오늘은 두 날 몫 곱빼기로 즐겨야 한다. 안개 속 동부산업도로로 접어들면서 차창을 열고 맑은 공기를 한껏 받아들인다. 찔레꽃 향기가 훅 풍겨 살펴 보았더니, 길섶은 군데군데 하얀 찔레꽃의 향연을 벌이고 있다. 시인 김준태는 찔레꽃을 '사운대는 혼(魂)무더기'라고 했었다.

"그대여 눈 비비려거든 내게로 오라

찔레꽃 흰 입술도 옆 사람을 포개고
찔레꽃 푸른 가시도 그대 피맺힌 노래 풀어
파르라니 삐죵 삐죵 울라면 울어다오

출렁대는 강물 위에 흰 구름이 잠기듯
바람에 얼굴 비취며 가는 몇 마리 새
나 없을 때 와 몰래 향기를 머금는다

그대여 피 비비려거든 내게로 오라

숲 속에 흐르며 사운 사운대는 혼(魂)무더기
가지에서 가지로 푸드득 날면서도
달걀만 한 살의 봉지 열고 서러이 운다

하늘을 날던 그 마음 행여 잊을까봐
찔레꽃 피는 아픔도 행여 빠뜨릴까봐"
<김준태 '찔레꽃' 전문>

우진동을 지나는데 안개가 걷히기 시작한다. 서검은이오름 자락에 걸려 퍼덕이는 푸른 안개. 대천동 사거리에서 직진하다 왼쪽 성읍2리로 들어섰다. 마을을 옆으로 끼고 그 옛날 오지랖이 넓은 장영자가 샀다가 넘겨버린 '(주)넓은 목장' 정문 왼쪽 포장도로를 따라 진행하다, 개오름 뒤 포장이 끝난 곳에 차를 세우고 밭을 두 개 넘어 비치미오름 남쪽 자락을 거슬러 오른다. 드문드문 서 있는 소나무에 순이 꽤나 자랐다. 사이사이 하얀 찔레꽃의 진한 향기가 전설처럼 피어오른다.

"---고려 때, 우리 나라에서는 원나라에 해마다 처녀를 바쳤다. 가엾은 소녀 찔레는 다른 처녀들과 함께 원나라로 끌려가 살게 됐다. 그들은 마음씨가 착한 찔레에게 고된 일을 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찔레는 그런 대로 살만했다. 그러나 찔레는 고향과 부모형제들의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가난해도 괴로워도 부모가 좋고, 남루한 옷을 입어도 내 형제가 좋았다. 찔레의 향수(鄕愁)는 무엇으로도 달랠 수 없었다.

갈수록 고향이 그리워져 10여 년 세월을 눈물로 보냈다. 찔레를 가엾게 여긴 주인은 고려로 사람을 보냈으나 가족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찔레는 주인의 허가를 얻어 혼자 고향의 가족을 찾아 나섰다. 고향집이 불타 없어져버린 것을 확인한 찔레는 동생의 이름을 부르며 산 속을 헤매었다. 그렇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슬픔에 잠긴 찔레는 원나라로 다시 갈 기력을 잃어버리고 고향집 근처에서 죽고 말았다. 그 후 찔레가 헤매던 골짜기마다 그녀의 혼이 찔레꽃으로 피어났다."

비치미[飛稚山]는 북제주군 구좌읍 송당리 산255-1번지에 자리한 해발 344.1m, 앉은키 109m, 둘레 2,498m, 북동쪽으로 벌어져 있는 말굽형 분화구를 가진 오름이다. 오름 중턱에서 등성이에 이르는 곳이 풀밭이어서 목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그래서 어제 이곳에서 소들이 밤을 지낸 흔적이 역력하다. 엉겅퀴는 이제야 막 피기 시작했는데, 피뿌리풀꽃은 바야흐로 절정이다. 철늦은 미나리아재비와 양지꽃이 보이는가 하면, 구슬붕이가 별처럼 풀 속에 점점이 박혔다. U자형 등성이를 따라가다가 끝나는 곳에 앉아 주변의 오름들을 바라보며 술 한 잔 나누었다.


▲ 도리미에서 만난 소와 백로(白鷺), 그리고 피뿌리풀꽃

북동쪽 등성이를 통하여 도리미로 향한다. 아침에 소가 이동하면서 찍힌 발자국이 패여 길이 생겼다. 비치미가 끝나는 곳에서 바로 도리미로 이어진다. 오름 초입에서 한가로이 몰려 서 있는 소들을 만났다. 오늘이 '부처님 오신 날'. 불교와 관련된 소를 만난 것도 인연(因緣)일까? 모두 노란 암소들인데, 그 가운데 태어난 지 2∼3개월 된 송아지들이 몰려 노는 것이 너무나 귀엽다. 어렸을 적 집에 암소를 많이 길러 송아지를 늘 몰고 다녔었는데.

앞장서 소 옆을 지나노라니, 서슬에 놀라 백로가 날아오른다. 한두 마리가 아니다. 비치미오름에서 민오름 방향으로 말들이 누워 있는 풀밭에 크고 하얀 새 40여 마리가 보였는데, 바로 이놈들이었구나. 나무가 있는 해안이나 못에 서식하며, 주로 어류를 포식하는 것들이지만 수서동물, 소형 포유류, 파충류, 새 새끼, 곤충 등도 닥치는 대로 먹는다. 가까이 연못이나 냇물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놈들 소에 기생하는 진드기 성충에 맛을 들여 소 옆에서 서성대던 것 같다. 희고 깨끗하여 청렴한 선비로 상징되던 놈들인데, 이쯤 되면 사람이나 짐승이나….

큰돌이미(도리미, 大石額岳)는 해발 311.9m, 앉은키 82m, 둘레 2,471m의 나지막하고 넓게 벌어진 오름이다. 비치미와 자락을 맞대고 있긴 하지만 분화구의 방향은 정반대이다. 등허리는 풀밭이고, 분화구 사면으로 가시덤불이 우거져 있어 소를 기르기에 적합한 곳이다. 저만치 평평한 벌판을 지나 조그만 알오름, 오름 정상부에 용암 유출의 흔적으로 바위들이 우뚝 솟아 있다. 옆으로 돌아 그 봉우리에 오르니, 좁은 곳이지만 다양한 식생을 보인다. 눈에 띄는 대로 "철쭉, 천선과, 윤노리, 보리밥, 사스레피, 섬쥐똥, 예덕, 찔레, 꾸지뽕나무와 참나리, 원추리까지…."

그곳을 넘어서니, 나무 사이 잔디밭에 피뿌리풀꽃의 향연! 오늘 만개한 채로 우리를 맞는다. 피뿌리풀이란 이름은 뿌리가 붉어서 붙은 이름이다. 피뿌리풀은 우리나라에서는 오직 제주도에서만 자생한다. 처음 진한 분홍색의 꽃봉오리에서 점차 만개하며 분홍색으로 밝아지는데, 그 연속적인 색의 변화가 얼마나 고운지 모른다. 이 부근 개오름이나, 비치미, 도리미, 문석이오름 등에만 분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뿌리를 약으로 쓴다고 하지만 그보다는 곱고 희귀하기 때문에 도채(盜採)가 심한 형편이다. 실제로 뿌리가 잘린 채 꽂혀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 '부처님 오신 날'에 오른 성불(成佛)오름

동부산업도로에 나와서 서쪽으로 돌아오다 승마장 바로 앞에 보이는 성불오름엘 오른다. 성불오름(成佛岳, 성보람) 역시 송당리에 자리잡은 해발 361.7m, 앉은키 97m, 둘레 2,221m의 나지막한 오름이다. 지금은 심어놓은 삼나무에 가려 그 윤곽이 흐릿하지만 기막힌 여근곡(女根谷)을 이루고 있어, 남자들이 지나다니다 싱긋이 한 번 웃고 간다는 오름이다. 말굽형 분화구가 남쪽봉우리에서 북쪽봉우리에 이르는 등성마루에 에워싸여 동향으로 얕게 패여 있고, 그 골짜기 사이가 둥그스름하게 부풀어올라 숲이 우거지고, 그 속에 '성불천(成佛泉)'이라는 샘이 있다.

승마장 옆을 돌아 곧바로 계곡을 향해 삼나무 숲길로 접어든다. 비 온 지 사나흘이 지났는데도 물 흐르는 소리가 낭랑하다. 옛 기록에 의하면 정의현성(旌義縣城), 지금의 성읍민속마을 안에 샘이 적어 주민들은 이 샘물을 길어다 먹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예전에는 나무가 울창하여 성읍리 주민들을 거의 먹여 살릴 만큼 수량이 풍부했다고 하나 지금은 수량이 줄어들었다. 20여 년 전 시멘트로 통을 만들고 꽤 굵은 관을 묻어 사용했던 흔적이 보기 싫게 남아 있었다.

우거진 수풀을 헤쳐 들어가니, 조그만 샘에서 물이 졸졸 흘러나온다. 지형이 묘하게도 여체를 연상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행했던 남녀 모두 물을 받아 마시면서 맛있다고 야단이다. 옆에는 미나리가 돋아나고, 숲으로 머위와 양하가 보인다. 돌아 나와 위로 올라 조금 걸어 들어가니 옛날 절이 자리잡았을 법한 곳에 무덤이 몇 개 들어서 있다. 지형적으로 배꼽 아래깨에 해당되는 부분으로 명당이라는 포란형 지형인 셈이다. 무덤을 두른 담장에 기와편이 섞인 것으로 보아 이쯤이 절터임이 확실해 지는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이원진의 <탐라지>에는 '성불암은 성불오름 중턱에 있다.' '성불오름 중턱에는 성불천이란 샘물이 있어, 성불암 스님들과 주변 마을사람들이 이용했었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까지 확인된 유물이나 문헌상으로 볼 때, 성불암은 고려시대 12세기경에 창건되어 대략 18세기경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혹시 절5백 당5백을 불태웠다는 이형상 목사 시절인 18세기초에 소실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오름 동남쪽 봉우리에는 신성스럽게 용암 노두가 솟고, 그 밑으로 조그만 동굴이 있다. 거기서 주위 오름을 돌아보니, 부처님 상 위에 괴여놓은 차례탑 같다. 내려오면서 성불(成佛)을 생각해 본다.


▲ 송당목장의 주시설 위에 자리잡은 칡오름

가까운 곳 오리구이 집에서 점심을 든 후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칡오름(葛岳)에 오르기로 했다. 오늘 오른 오름은 4개 다 송당리 지경에 있으며 반경 2∼3km 안에 있는 오름들이다. 해발 303.9m에다 앉은키가 겨우 49m이며, 둘레 1,539m인 오름이어서 처음부터 오르기도 뭐하고 일부러 찾아가기도 그래서 계륵(鷄肋)처럼 여기며 언제나 옆에 두고 지나쳐 왔던 것이다. 사람도 마음도 그런 건 아닐지? 거두기도 그렇고 안 거두자니 다른 곳에 가서 붙어 버릴까봐 전전긍긍하는 그런.

송당마을로 들어가다가 오른쪽으로 나 있는 삼나무 숲길을 달린다. 양쪽에 나무가 자라 쭉 뻗은 길을 좋아하는 사람은 탄성이라도 나올 법하다. 한참 달리다 왼쪽으로 조금 들어가니 당시 관리사와 축사(畜舍)로 쓰였던 건물이 나온다. 규모가 깨 크지만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서 다 낡아버렸다.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 '낙농 한국'의 기치를 높이 걸어 이곳에 송당목장을 설치하고 관심을 기울였다. 중학교 3학년 때 수학여행으로 이곳까지 와서 목책에 매달려 찍은 사진이 아직도 남아있다.

삼나무 그늘 아래 천남성 잎사귀 하나가 우산만큼 커다란 것을 바라보며, 뒷산에 오르듯이 쉽게 등성이에 오른다. 저 건너에 있는 높은오름이 하늘로 머리를 치켜들었다면, 이 칡오름은 땅에 바짝 엎드려 있는 형국이다. 예전에 칡이 많아서 칡오름이라 불렀다 하나 칡은 발견되지 않고 삼나무가 심어진 사이사이에 목초와 억새가 얽혀 자라고 있었는데, 근래에 2∼3년생 느티나무를 오름 등성이 전체에 심어놓았다. 부근에 남북으로 오름이 일직선의 화산구조선을 이루는데 그 중앙부에 위치하고 있다.

쉽게 내려와서 다시 그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민오름 옆에 자리한 이승만 대통령의 별장 '귀빈사(貴賓舍)'로 갔다. 규모는 얼마 되지 않으나 꽤 신경 써서 지었다. 당시 교통도 불편하고 호텔 하나 변변한 게 없던 시절이어서 아예 이곳에 별장 형태로 지은 것이다. 이로 미루어 이 사업에 얼마나 정성을 기울였는지 알만하다. 당시 외제 스팀 시설이나 욕조, 그리고 침실과 집무실이 그런 대로 남아 있었는데 사람에게 알려지면서 황폐해졌다. 수리해서 주변의 오름이나 본향당, 비자림 등을 연계해서 관광지로 개발하면 어떨까? 첫 단추를 잘못 끼운 대통령의 자취를 보존하는 의미에서라도. 하하하.

동반자 : 고길홍 구웅서 김봉선 박기배 변신규 양영태 장성희 김동한 이창현 김영임 부두홍(11명)

<사진> 위는 찔레꽃, 아래는 피뿌리풀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