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오름 이야기

빗속에 더욱 찬연한 들꽃

김창집 2002. 11. 1. 09:35
 통오름, 독자봉 답사기





♧ 모구리오름과 유건에오름을 목표로



빗속의 여섯 오름 나그네
문뜩 길 넓히노라 없어졌을지도 모르는
봉개동 할머니 집이 생각나
위태롭게 남아 있는 좁은 가게에서
인사로 김밥 한 줄 썰어 막걸리 한 잔씩 마시고
모구리오름과 유건에오름엘 간다고 길을 떠났다.

동부관광도로 대천동 사거리도 그냥 지나고
성읍 민속마을 입구에서 왼쪽으로 영주산을 바라보며
성산포로 가는 길로 들어서
오른쪽으로 처음 만나는 모구리오름 앞에 이르니
앞뒤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의 비바람 때문에
도저히 차에서 내릴 수 없어 그냥 남쪽으로 가보자고
승마장으로 사용중인 나시리오름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유건에오름도 뒤로하고 청소년 야영장을 넘어섰다.




♣ 통오름 --- 아늑한 어머니의 품속



제주의 운치를 가득 품고 있는 16번도로를 만나
오른쪽으로 돌아 고개를 막 오르는데 갑자기 가늘어지는 비
차가 멈춘 곳은 통오름과 독자봉이 마주 보는 곳
아무래도 오늘은 이 오름이 인연에 있나 보다 하고
통오름에 올라 보기로 했다.
마침 다음 주 탐문회 성산읍 답사 때 회원들을 안내해
오르기로 예정된 오름이라 사전 답사가 되는 셈이다.

해발 143.1m지만 실제 높이(비고)는 43m밖에 안 되는
둘레 2,748m에 면적 258,114㎡의 어머니 품 속 같은 오름이다.
오름 전체가 완만한 기복을 이루면서
둥글고 낮은 5개의 봉우리가 화구를 에워싼 원형 분화구의 형태이나,
서쪽으로 좁은 골짜기를 이루며 말굽형 화구를 이룬다.
많은 들꽃을 가슴에 안고 그들을 촉촉이 적시는 모습에서
대자연의 질서와 계절의 변화를 느낀다.




♧ 쑥부쟁이, 너 가을꽃의 전령사여



오름은 온통 쑥부쟁이 밭이었다.
비에 젖어 후줄근히 서 있는 억새밭 속에도 불쑥불쑥 솟아 있다.
한 쪽 소나무 숲에서 비를 피하고 서 있는 말들이
여름 내내 뜯어버렸는데도 어디 숨어 있었는지 줄기를 뽑아 올려
재작년 이곳에 들렀던 어느 시인의 말처럼
온 산에 서리가 내린 것처럼 피워 올린 보랏빛 향연이여!

그곳에 네가 있음도
네 이름의 의미도
나는 알지 못했다.
오랜 기다림과 인고의 세월들을
가슴속에 온전히 끌어안고
가슴 아픈 사랑 하나
끝내 이루지 못해
해맑은 가을 하늘 아래
지친 목 길게 빼 들고
연보라 빛 고운 꽃잎으로
눈물 속에서 피어난
바람의 꽃.
--- 이정화 『쑥부쟁이 꽃』전문




♣ 섬잔대, 제주의 산야에만 피어나는 꽃



아무래도 제주 가을 오름의 주인은 섬잔대이다.
제주가 한반도에서 남쪽으로 뚝 떨어져
태평양 거센 바닷바람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화산회토로 이루어진 섬이어서 그런 진 몰라도
본토와는 다른 여러 가지 꽃이 핀다.
'귤이 회수를 지나면 탱자가 된다'는 말처럼
들꽃도 남해를 건너오면 다른 모습으로 변한다.

오늘 보는 꽃들 중 섬잔대와 한라부추도 그렇고
한라돌쩌귀, 탐라황기, 한라산비장이, 제주달구지풀,
그밖에 따로 이름을 달지 않은 것들까지…….
남쪽 등성이 분화구 쪽으로 들어앉은 강씨 할머니 꽃무덤엔
수십 종의 꽃들로 수놓아졌다.
아! 저기 보이는 여기저기 길을 뚫으며 옮겨놓은
점점이 박힌 이름 없는 무덤에는 무슨 꽃들이 피어 있을까?




♧ 독자봉 오르는 길에 막 피기 시작한 물매화



옛날 온 섬을 둘러 왜적이 쳐들어왔음을 알리던
독자 봉수로 오르는 길에 점점이 피어오른 물매화
희다 못해 푸르스름한 기운까지 띠고 있는 소심(素心).
누가 이름하였을까,
백로(白露)를 지나서야 찬이슬을 머금고 피어나는 꽃.
그 옆에 빨간 찔레 열매가 있어서도 그렇고
아직도 줄기차게 피어오르는 노란 미역취가 있어서 더 청초하다.

10년 전 지금은 돌아가신 향토 사학자 김봉옥 선생님과 처음 올랐을 때
정원에 옮겨 심고 싶을 정도로 멋있던 소나무들은
이제는 다 자라 보기 싫게 변해버렸어도, 들꽃들은 여전하다.
다음 주 올라왔을 때 한창 좋게 피어날 꽃향유도 그렇고
비에 젖어 더 찬란히 빛나는 들꽃들
해안도로로 넘어오다 들른 시흥리 해녀 식당에서
삶은 군소 안주에 술 한 잔, 조개 죽을 먹으면서도 눈에 삼삼 어린다.


 

 


(사진은 물매화, 섬잔대, 통오름 2002. 10.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