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오름 이야기

눈의 나라 '한라산' 등반

김창집 2003. 3. 20. 15:31



(한라산에서 맞은 올해 첫 일출)

▲ 기다림 끝에 얻은 행복

한라산에 눈이 많이 내린 것을 알고는 날씨만 좋아지기를 빌며 기다리던 날이
왔다. 신문이나 TV 뉴스에 눈이 쌓여 있는 사진만 나와도 가슴이 울렁거렸다.
6시에 모이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저녁에 미리 배낭을 챙긴 뒤 쌀을 씻어놓고,
자명종 시계를 4시 50분에 맞춘 뒤 12시 넘어서 잠이 들었는데, 처음 깬 것이
2시 48분. 몇 번 잤다 깼다를 반복하며 4시 반이 되길래 아예 일어나 밥통에
남은 밥을 푸고 밥을 얹힌 후 배추 된장국을 끓여 아침을 든든히 먹었다.
밥은 뜸을 들일 틈도 없이 퍼서 보온 밥통에 담고, 위아래 통엔 물과 반찬 대신
국을 넣었다.

모이는 장소에 가보니 모두들 잠을 설쳤다고 야단이다. 그러면서도 모두들
싱글벙글 애인을 만나러 가는 사람들처럼 들떠 있다. 모두 아홉 사람. 차 두 대에
나눠 타고 막 떠나려는데 휴대 전화가 울렸다. 4시까지 잠 못 이루다 깨고 보니,
지금 시간이란다. 화장을 해야 되고 밥도 먹어야 되는데 시간이 안되어 못 간다는
것이다. 건네 줄 물건도 있고 배웅도 할 겸 지금 차로 곧 달려오겠단다. 보통 오름
가는 날 같으면 기다려도 될 것을 그것마저 거부할 수 없었다. 약밥 재료까지 다
구해 놓고 감기 낫기를 기다리다 못 가는 회원도 있는 것을 보면, 건강하게 한라산을
오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이 아닐 수 없다.

무얼 하러 가기에 이렇게 즐거울까? 영국의 등산가 C. 맬러디는 '산에 왜 가는가?'
라는 물음에 '산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했다. 내 차에 3명을 태우고 전조등
불빛이 가리키는 대로 성판악으로 달렸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는 별이
총총히 나 있어 '오늘은 별 볼일이 있겠다.'고들 좋아한다. 바람도 불지 않고 포근하다.
오라골프장을 지나면서부터는 길섶에 치워놓았던 눈이 칼로 자른 듯이 쌓여 있다.
'네 영혼이 고독하거든 산으로 가라'고 독일의 어느 시인이 노래했다는데, 새해 벽두에
설산(雪山)을 오르는 기분이라니.

모처럼 얻은 기회에다 좋은 날씨이다. 눈길을 걸어 기분 좋은 땀을 흘리며 1년 동안
내가 해야 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리라. 한편으로는 지난 세밑 망년회 때 10여일에
걸쳐 연거푸 퍼마셨던 술 때문에 몸이 망가지지나 않았는지 건강도 체크해봐야겠다.
그리고, 맑고 깨끗한 산의 정기를 흠뻑 마시고 새로운 활력소를 얻어 2003년도
건강하게 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성판악 주차장은 눈을 치우지 않아 어지럽게
얼어있는 가운데 버스에서 내린 관광객들이 술렁이고 있었다. 차를 둘 곳이 없어
등산로 입구 옆에 간신히 붙일 정도였다.



(상고대, 물기가 나뭇가지에 붙어 고드름이 된 것)

▲ 3년 연속 오르는 겨울 한라산

머리를 풀어헤친 채 누워 버린 너는
섬 한가운데에서 부끄럼 없는 모습으로
가슴을 내밀고 있었다.

수많은 오름을 출산한 열정이 아직도
다하지 못한 것이 있었는지
온몸에 지르르 감도는 전율은
네가 뿜어낸 소리 없는 기운이라고

핑돈다, 허약하게 흔들리는 내 모습
가벼운 종이 날에도 손가락 끝이 베이는
이젠 그 여린 마음은 접어두라고

무릎까지 쌓인 눈밭에 검은 까마귀 떼를 보내
나를 거세게 잡아두려나 보다
까마귀 소리가 기분 좋게 온몸에 감기는 것을 보니

-- 목필균 '한라산의 느낌' 전문

사람의 심리란 묘한 것이어서 하지 말라고 하면 공연히 하고 싶어진다. 막아놓았던
한라산을 겨울 석 달 동안 풀어놓는다 하니까, 정말 가보아야 하겠다는 생각에 시작한
겨울 등반이 오늘로 세 번째가 되는 셈이다. 그리고, 작년 6월 월드컵 때문에 모처럼
연 여름 한라산을 올랐으니 2년도 채 안 되는 사이에 네 번째가 아닌가. 오름 모임에서
정기 답사로 집어넣었으니까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연중 행사가 될 것 같다. 처음 등산
때 질 나쁜 아이젠을 착용해서 사타구니에 가래톳이 생긴 다음부터는 그걸 배낭 속에
넣어두고 자동차 타이어에 뿌리는 체인 액만 뿌리고 7시 2분, 드디어 출발이다.

눈은 7∼80cm는 좋이 쌓였고, 사람이 오갔던 길은 눈이 다져져 미끄러웠다. 길을 좀
넓게 만들었으면 좋았을 것을 한 사람이 다닐 정도밖에 되지 않아 추월하거나 교차시
불편하기 그지없다. 잘못해서 깊이 빠졌던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 있다. 한 줄로 늘어서서
가다보니, 오르막길에서는 정체되어 답답하다. 노루도 다 중산간으로 내려가 발자국 하나
없고, 가끔 눈덩이 굴렀던 자국만 보인다. 추워서 새도 다 내려가 버린 이곳에 호사스런
인간의 목소리와 발자국만 어지러울 뿐이다. 단체 여행객은 왠지 경상도 말을 쓰는
분들이 대부분. 7시 32분경에 해가 떠오른다. 나무 사이지만 일출 광경이 황홀해 셔터를
눌렀다. 새해 첫날 찾아가서도 못 봤는데, 그것도 한라산에서 첫 일출의 감격을 누렸다.



(구상나무에 쌓인 눈)

▲ 설산(雪山)을 오르는 사람들

3분의 1쯤 올랐을 때 벌써 내려오는 분들이 있어 인사를 하고 물어보니 2시에 출발
했다고 한다. 요즘 들어 한라산 중독증에 걸린 사람이 많다. 한 주라도 빠지면 안달이
나는 사람들. 일요일 새벽 4시쯤 나서서 어리목 코스나 영실 코스로 왕복 6시간 걸어서
10시면 돌아와 볼일을 보는 것이다. 산에서 사람을 만나면 대체로 인사를 한다. 인사를
받는 자세는 두 가지다. 하나는 진정으로 반가워서 받는 인사이고, 다른 하나는 마지못해
건성으로 하는 인사이다. 지금처럼 길도 반듯하지 못하고 떼로 몰려다니지도 않던 시절,
수 시간 동안 길을 잃고 헤매다가 사람을 만났을 때를 당해본 사람이면 그 반가움의
정도를 알 것이다.

30분쯤 걷고 쉬기를 반복하며 계속 눈 위를 걷는다. 오늘 따라 몸이 안 좋은 분들이
너무 많다. 60세를 갓 넘긴 백전노장 한 분은 월, 화, 수 3일 동안 감기로 누웠다가
욕심으로 나와 계속 고전이고, 또 한 분은 당뇨로 힘든 데도 '한 번의 산악 등반은
한약 한 제 먹는 것보다 낫다'고 억지로 나와서는 쉬기를 계속한다. 그 외에도 혈압
때문에 작년 진달래밭 대피소에서 되돌아갔던 분, 잠을 못 자 허덕이는 분, 과음했던 분,
질 나쁜 아이젠 때문에 다리가 아픈 분…. 따지고 보니 정상적인 사람은 나와 두 분
뿐이다. 이러다가 내년 정기 산행에 겨울 한라산 등반을 빼야 될 것 같은 기분이다.

며칠간 날씨가 좋았던 때문으로 나무 위의 눈은 많이 녹아 내렸으나 낙엽수 아래 작은
나무들이 있는 곳은 아직도 여러 가지 동물 모양을 하고 있다. 꼭 공작이 나래를 펴고
앉은 것 같은 게 있어 "공작이 앉아 있다!"니까 진짜인 줄 알고 두리번거리다가 그럴
만도 하다는 듯이 모두들 웃는다. 큰 나무에는 암(癌) 치료제 성분을 추출하는 참나무
겨우살이 열매가 빨갛게 익어 하얀 눈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동백나무겨우살이가 꼭
동백나무에만 기생하는 게 아니듯이 참나무겨우살이도 성질이 비슷한 서어나무에 많이
기생하고 있다.

4시에 올라갔다는 사람들이 내려온다. 너무 오르기 힘든 나머지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내려오는 사람들을 부러워하지 말라고 했다. 그들은 이미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을 다 누린 상태이고, 우리는 힘은 들겠지만 정상 정복의 기쁨과 백록담의
아름다운 모습을 맘껏 즐길 기회가 남아 있으니까. 생각해 보니 등산은 우리 인생길과
매우 흡사하다. 남들이 가니까 나도 따라 목표를 향해 간다. 앞서 갔던 사람이 갔던
길이니까. 힘들고 괴롭지만 중간 중간에 기쁨도 있고 목적을 이루었을 때의 성취감도
있다. 정상에서 목표를 달성하고 더 올라갈 곳이 없으면, 정년(停年)을 맞아 쫓기듯이
내려 와야만 하는 것이 인생이 아니던가.



(백록담의 눈)

▲ 진달래밭 대피소에서 정상까지

산에 올라 눈 위에서 라면에 소주를 마셔본 사람이라면 그 맛이 어느 정도라는 걸
안다. 운동을 했기 때문에 배도 적당히 고프고 추워 뜨끈한 국물을 마시고 싶기에 더욱
당긴다. 게다가 톡 쏘는 차가운 소주는 어떻고? 사발면 하나에 물을 부어서 1,500원,
라면을 가지고 가면 뜨거운 물을 넣어주고 500원, 커피도 500원이다. 이곳까지 날라 온
것을 생각하면 싼 편이다. 많이 먹으면 걷기 힘들다고 점심은 내려가다 먹기로 하고
라면과 떡, 삶은 달걀로 요기를 했다. 옆의 관광객 한 분이 밤새 술을 마셔서 도저히
못 먹겠다고 내놓은 도시락 반찬에 술 2병을 비우고는 정상을 향해 출발이다.

이곳에서 정상까지는 2.3km인데, 보통은 1시간 30분이 소요된다. 드디어 구상나무 숲이
나타나고 가끔씩 자작나무가 공주처럼 하얀 속살을 내보인다. 온통 눈을 이고 있는
구상나무 군락지에서는 탄성을 지르며 사진 찍기에 바쁘다. 여기서부터는 시야가
트이어서 정상과 오름들이 전모가 드러난다. 우리가 왔던 길을 되짚어 멀리 성판악과
사라오름이 보이고, 왼쪽으로 암수 오름의 짝으로 이름 붙여진 돌오름과 흙붉은오름이
다정하다. 선인들의 지은 이름이 다시 한 번 빛나는 순간이다. 어쩌면 저렇게 사람의
성기를 닮았을까.

12시 2분. 드디어 일행 중 1착으로 정상에 올랐다. 백록담을 바라보면서 성취감에 소리
지르는 사람, 꼭 사진을 찍어둬야 한다고 포즈를 취하고 재촉하는 사람, 배가 고픈지
허겁지겁 밥을 먹는 사람, 잘 터지지도 않은 휴대 전화기를 들고 누구에게 알리고 싶어
애쓰는 사람. 어디다 숨기고 왔는지 벌써 술을 부어놓고 건배를 외치는 사람도 있었다.
술렁이는 사람들 속에서 일행이 올 때까지 백록담과 주변 사진을 찍었다. 카메라 렌즈가
작은지 백록담이 한꺼번에 다 들어오지 않는다. 2만5천년 전만 해도 시뻘건 불덩어리를
토해내던 분화구엔 온통 흰눈으로 가득하다. 그런 위대한 자연의 힘 아래서 허우적거
리는 인간이란 얼마나 미미한 존재인가.

12시 30분까지 별고 없이 일행 아홉 명이 다 도착했다. 이런 산행에는 많아야 10명
정도가 알맞다. 너무 많으면 통솔하기가 힘들다. 작년 6월 59명을 데리고 왔다가 통제
불능의 상태가 되어 혼났던 기억이 난다. 우선은 따뜻한 차를 꺼내 격려하고 사진을
찍었다. 모두가 그간의 고생을 잊은 듯이 희희낙락하는 것을 보니 일단 마음은 놓인다.
1시에 관음사 코스로 하산할 것을 예고했다. 이 코스는 전체의 거리가 8.7km인데,
9.6km의 성판악 코스보다 짧으나 눈이 오면 용진각까지 너무 가파라서 위험하다. 구상
나무 군락이 끝이 안 보일 정도로 펼쳐지고 눈을 이고 있는 모습은 황홀, 그 자체다.



(왕관능 위 눈밭)

▲ 관음사까지 설국(雪國)의 하산길

내려오다가 배가 고프다고 구상나무가 바람을 막아주는 틈새 햇빛이 비치는 곳에
자리를 잡고 점심을 먹었다. 작년에는 바람이 심해 용진각 대피소에서 먹었는데, 너무
지저분해서 영 아니었다. 왜 깨끗하게 사용하지 못하는지 한심하기 짝이 없다. 아름다운
자연에 오면 경건을 배워 더 가꾸려 해야지 남이 안 본다고 이렇게 어지러이 굴면
되겠는가? 곳곳에 생수병을 던져버린 것을 보면서 한심한 생각이 든다. 눈 위에 앉아서
먹는 점심은 음식이 빨리 식어 그렇지만 재미있다. 아이들이 오랫동안 사용했던 보온
밥통은 이미 성능의 한계를 넘어 밥과 국은 다 식어버렸다.

한라산
사제비동산 가는 길가에
넋이 나간 고사목(枯死木)
죽어서도 미래를 사는 고집

살아서 청청했다
죽어서 꼿꼿한 뼈대
마른 주먹엔 무엇을 쥐고 있을까

푸른 생명들 속에서
기죽지 않고 서서
언제 말하려 하는지

살아서 겪은 일 들으려고
노랑나비 흰나비 나와 함께
맴돌고 있는데

---이생진의 '한라산 고사목' 전문



(구상나무 고사목)

옆에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을 버틴다는 구상나무 고사목(枯死木)이 나란히 서 있다.
예전엔 그렇게 많더니, 요즘은 구경하기조차 어렵게 되었다. 대부분 벼락을 맞아 죽게
된 것이다. 가파른 길을 반은 미끄럼을 타면서 용진각까지 내려갔다. 작년에는 이곳에서
훈련하던 등산객들이 죽은 사고로 떠들썩했는데, 오늘은 사제비동산 아래로 발자국만
어지러이 찍혔다. 용진각 아래에 있는 샘에 물을 마시러 들어가다가 흐르는 물로 녹아
내린 곳에 푹 빠졌다. 가슴 깨까지 눈이 찼다. 하마터면 카메라에 물이 들 뻔했으나
피해는 없었다. 겨울산은 이렇게 곳곳에 함정을 파놓고 있어 조심하지 않으면 큰 화를
부를 수 있다.

삼각봉을 지나 왕관능이 잘 보이는 곳에서 일행을 기다리며 사진을 찍었다. 눈이
얼마나 내렸는지 여기 놓였던 평상은 자취도 없다. 그리고 지난번에는 까마귀가 다가와
먹을 것을 요구하더니 오늘은 하나도 안 보인다. 그들을 주려고 먹다가 남은 음식을
거두어 왔는데. 추워서 다 내려갔나 보다. 옆 분에게 빨리 내려가 성판악에서 차를
가지고 오마 하고 개미등에서부터 빨리 걷기 시작했다. 사람이 없어 이제야 제 속도를
내 보는 것이다. 혼자서 마음껏 생각하고 좋은 경치를 보면 사진도 찍으면서 탐라계곡
능선에 이르렀을 때, 앞서 가던 일행 한 분을 만났다. 전화가 안 통해 차를 가지러 같이
갈 분이 앞에 갔는지 뒤에 떨어졌는지 몰라 답답하다.

5시 10분. 다시 1착으로 관음사 야영장에 도착했다. 전화가 통하길래 연락했더니 같이
차 몰러 갈 분은 10분 후 도착 예상이라는 전언이다. 장비를 착용하느라 늦었고 마지막
으로 출발해 오면서 보니까 모두 잘 걸어 위험한 탐라계곡을 넘었다고 해서 일단 마음은
놓였다. 거의 10시간을 눈에서 헤매었지만 땀을 흘린 뒤여서 몸이 개운하다. 지팡이도
없이 아이젠도 착용 않은 채로 완등(完登)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동안 사라봉과 별도봉을
오르면서 몸을 다진 결과이리라. 앞으로도 열심히 운동해야겠다. 깨끗한 눈에 머리를
씻고 원 없이 기(氣)를 충전시킨 하루였다. [2003. 1. 12.]

□ 동반자 : 김세엽 고길홍 고제량 구웅서 김혜란 양영태 오창홍 정경화



(정상에서, 오른쪽에 선 것이 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