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오름 이야기

별도봉, 사라봉의 봄 들꽃 잔치

김창집 2002. 3. 15. 14:47

♣ 민들레와 제비꽃, 그리고 미나리아재비 꽃이 피었습니다

어제 오후는 봄볕이 쏟아지는 밝고 환한 날씨였다. 새벽에 내리던 비는 정오 무렵에 멈추고, 촉촉한 땅 위로 짙어진 풀빛과 물오른 나무는 결국 나를 오름 산책길로 불러내고 말았다. 초록빛으로 단장한 버드나무 몇 그루가 서 있는 별도봉 오솔길로 들어선 순간, 맨 먼저 눈에 띄는 건 샛노란 민들레였다. 햇볕이 내려쬐는 길섶 양지쪽의 민들레는 햇빛을 받아 눈부실 정도로 아름답다. 엊그제 산책길에서 흘깃 보았던 모충사 안의 새하얀 민들레 꽃씨는 비바람에 모두 흩어졌겠지?

다음에 나를 맞은 건 제비꽃이었다. 저렇게 작은 몸집에서 어떻게 저런 앙증맞은 꽃들을 밀어 올렸을까? 봄의 여신은 어느 하나에만 머물지 않고 이 가녀린 생명에게도 그 손길을 주어 저토록 빛나는 색을 토해내게 한 것이다. 누가 저 아련한 꽃에다가 가증스런 오랑캐꽃이라는 별명을 붙였단 말인가? 한 번 퍼지기 시작하면 오랑캐가 밀려드는 듯한 기세로 주위를 온통 채워버린다고는 하나 못 믿을 일이다. 꼭 세 포기가 있어 길섶을 지나는 나그네에게 감동을 준다. 옆의 돌나물도 제법 자랐다.

오른쪽으로 길에 면한 어느 관사 울타리의 개나리꽃도 기지개를 펴고 노랗게 타오른다. 그리고, 쇠별꽃과 개불알풀꽃이 온통 길섶을 장식했다. 보리알 크기의 꽃을 피우는 이 놈들은 향일성이어서 응달진 곳에서도 햇볕이 들 때만 수줍게 꽃잎을 벌린다. 이 두 가지 꽃은 별도봉에서 사라봉 정상까지의 길섶을 꽉 메우고 왁자지껄 봄 들꽃의 향연을 벌이고 있다. 진작부터 있었던 것이었지만 오늘 따뜻한 햇볕을 받고서야 그 존재를 맘껏 드러내는 것이다. 인간사도 마찬가지다. 그늘에서 남모르게 묵묵히 일할 때는 모르지만 그 선행이 알려졌을 때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는….

곳곳에 갈퀴들도 그 동안 몰라보게 자라 무성한 잎 사이로 보랏빛 꽃들을 달고 있다. 그 그늘에서 자란 달래가 가늘고 긴 잎을 뻗쳐 있어 두어 개 뜯어 냄새를 맡으니, 향긋한 봄 향기가 묻어난다. 사이사이 쑥들도 제법 자라났다. 소나무 숲길을 지나면서 완연한 잎을 갖춘 어린 벚나무를 본다. 어느 새 저렇게 자랐을까? 오르막길을 오르면서는 땀까지 솟는다. 소나무 숲을 지나고 나면 무덤이 더러 있고, 확 트인 풀밭에는 미나리아재비가 노랗게 피어 무더기를 이루었다. 무덤을 살펴봤지만 아직 양지꽃이나 할미꽃은 안 나타난다.

♧ 저 잔잔한 바다 물빛에도 어느새 봄빛이

어제 바다는 잔잔하여 물 속까지 환히 드러나 보이더니, 오늘은 바람이 조금 불어 잔물결이 인다. 햇빛이 골고루 비치고 있어 물빛이 곱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시커멓게 전형적인 겨울 바다의 모양을 하고 있더니, 어느새 저렇게 봄 바다의 맑은 빛으로 바꿔버린 것이다. 오리나무 꽃은 새벽 비바람의 횡포에 무참히 땅에 떨어져 죽은 벌레의 모습으로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는 반면, 그것을 시원히 떨구어버린 나무는 가뿐한 모습으로 옅은 초록의 잎사귀를 한없이 피워대고 있다.

오늘 따라 저 멀리 자살 터 바위의 ‘다시 한 번 생각하라!’라는 페인트 글씨가 흐려 보인다. 이 맑은 봄날 들꽃들이 잔치를 벌이는 이곳에서, 더욱이 저런 고운 바다 속으로 뛰어들 엄두가 나겠는가? 해변을 끼고 도는 산책길 정상에서 내리막길을 내려가며 한 무더기의 미나리아재비를 다시 만난다. 옆의 광대나물도 이제 마지막 남은 꽃을 피워대고 있다. 오르막길이 끝나는 곳, 좀 떨어진 곳에 피어 있는 하얀 꽃이 걸음을 멈추게 한다. 장딸기다. 이 놈은 따뜻한 곳에서는 그 잎을 전부 떨구지 않고 겨울을 나는 반낙엽관목이다. 다섯 장으로 된 하얀 꽃잎이 제법 크다. 이곳저곳 응달에는 자주괴불주머니가 꽃대를 밀어 올려 무더기무더기 꽃을 피워댄다.

♣ 비를 몰고 온 영등할망

별도봉 산책로가 끝나는 지점에 칠머리당이 나타난다. 10여 평 남짓한 신당 터엔 완연히 풀밭을 이루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음력 2월 초하루. 영등할망이 들어오는 날이다. 비가 안 왔으면 아침부터 이곳에서 영등굿을 벌일 텐데, 비 때문에 제주시 수협어판장에서 열린다는 소식이다. 올 영등할망은 비를 몰고 탐라국에 들어 왔다. ‘영등할망’은 매년 음력 2월 1일 제주 세경 너븐드르에 열두 시만곡씨(주곡 5곡, 부곡 7곡)를 뿌리고 해안을 돌면서 미역씨, 소라씨, 전복씨, 해초씨 등을 뿌려 생업의 풍요를 주고 우도(牛島)를 거쳐 본국으로 떠난다고 전해지는 바람의 신이다.

영등 환영제는 2월 초하루 제주 백성의 오곡 풍년 등을 기원해 주는 ‘영등할망’을 맞기 위해 행해지는데 제주칠머리당굿보존회(회장 김윤수)에서 주최하며, 중요무형문화재 제71호 제주칠머리당굿 전수 조교 고순안 심방(무당)이 집전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2월 초하루에 귀덕. 김녕 등지에는 대나무 12개를 세워 신을 맞이하여 제사를 지낸다. 애월에 사는 사람들은 떼 모양을 말머리와 같게 만들어 비단으로 꾸미고 약마희를 해서 신을 즐겁게 했다. 보름이 되어야 끝내니, 이를 연등이라 한다. 이 달에는 승선을 금한다”는 관련 기록이 나온다.

영등굿은 기록처럼 대개 해안을 중심으로 어부와 잠녀(해녀)의 해상 안전과 생업 풍요를 기원했지만, 중산간 지역에서도 농사가 잘 되라고 거행되었다. 영등굿 송별제는 음력 2월 14일인 오는 27일 이곳 건입동 칠머리당에서 열리는데, 그 때는 꼭 와서 보리라 다짐하며 그곳을 떠나, 사라봉으로 오른다. ‘할망’은 제주어로 ‘할머니’를 뜻하는 말이다. 아무쪼록 영등할망께서 많은 곡식과 해산물의 씨앗을 뿌리고 가 농어민들의 얼굴에 주름이 펴지길 기대해 본다.

♧ 꽃이 일찍 피어 걱정인 왕벚꽃, 유채꽃 잔치

사라봉으로 오르는 길은 소나무 숲이다. 산책로는 보도 불럭이 깔려 있고, 구불구불 네 굽이를 돌게 되어 있는데, 옆에는 벚나무를 심어 놓았고 가로등도 설치되어 밤에도 즐겨 찾는 명소가 되었다. 길섶에는 수선화와 근래 들어 털머위를 심어놓았다. 남쪽으로 오르는 길은 계단으로 되어 있는데, 벚꽃이 피면 불야성을 이룬다. 응달진 곳에 심어놓은 개나리도 이제 막 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오름 높이 148.2m에 3m 정도를 더한 망양정 정자에 오르면 눈앞에 제주항이 펼쳐지고 제주시내가 다 들어다 보인다. 한라산은 물론 맑은 날이면 추자도와 보길도. 거문도까지 볼 수 있다.

정자 쪽으로 뻗친 벚나무 가지에는 이제 팽팽한 꽃망울이 터져 4개로 갈라지고 그 끝이 분홍빛을 띠었다. 내일 모레면 피기 시작하여 다음 주에는 만개할 것이다. 올해는 다른 해보다 일찍 꽃이 피기 때문에 당국에서는 속앓이를 하고 있다. 왜냐 하면 왕벚꽃 축제 날짜를 4월 5일부터 7일까지 잡아 놨기 때문에 꽃 없는 축제를 치르게 될까봐 전전긍긍이다. 중문관광단지에서 치러질 제20회 유채꽃 큰 잔치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유채꽃도 지금 피기 시작했는데 일정은 4월 13일부터 15일까지 잡혀 있다. 항공편이나 숙박업소, 음식점 등 예약을 미리 해놓았기 때문에 변경도 힘들단다. 나는 약속을 어기고 남보다 먼저 피어 히죽이 웃고 있는 벚꽃이 없나 하고 여기저기 살펴보았으나 다행히 그런 놈은 없었다.

<사진> 위는 제비꽃이고, 아래는 미나리아재비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