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국내 나들이

순흥문화유적권과 소수서원

김창집 2008. 9. 6. 23:47

-- 탐문회 강원남부 답사기(완) 

 

     * 순흥문화유적권 선비촌 주차장 쪽에 서있는 주세붕 선생 동상


♧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


 사적 제55호 소수서원(紹修書院)은 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151번지에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이자 사학기관이다. 조선 중종 37년(1542)에 풍기군수 주세붕이 안향을 제사하기 위해 사당을 세웠다가, 중종 38년(1543)에 유생들을 교육하면서 백운동서원이라 하였는데, 명종 5년(1550)에는 풍기군수 이황의 요청에 의해 ‘소수서원’이라 사액(賜額)을 받고 나라의 공인과 지원을 받게 되었다.


 중종 39년(1544)에는 안축(安軸)과 안보(安輔)를 제사지냈고, 인조 11년(1633)에 주세붕을 더하여 제사지냈다. 서원 건물은 비교적 자유롭게 배치되었는데, 일반적인 서원의 배치가 완성되기 이전인 초기의 서원이기 때문인 것 같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바로 명륜당이 있고, 학생들이 머물며 공부하는 일신재와 직방재가 연속으로 있다. 서원의 일반 배치가 강당 좌우에 대칭으로 동, 서재를 두는 것인데 비해, 소수서원은 현판의 이름으로서 구분하였다.


 사당은 명륜당의 서북쪽에 따로 쌓은 담장 안에 있고, 서원이 있던 자리에는 원래 통일신라시대의 절인 숙수사가 있었는데, 그 유적으로 당간지주와 초석 등이 남아있다. 소수서원은 조선시대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 살아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며, 지금도 매년 봄, 가을에 제사를 지낸다. 그리고 국보 제111호인 회헌영정, 보물 제485호인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 보물 제717호인 주세붕 영정이 있고, 서장각에는 141종 563책의 장서가 있다.


  * 보물 제59호 숙주사지 당간지주

 

♧ 서원 일부는 숙주사 터


 소수서원에 들어설 때마다 분위기가 엄숙해지는 것은 낙락장송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수령 3백년을 넘나드는 이 나무들은 적송(赤松)으로 언제나 푸른 기상이 군자를 닮았다고 하여 선비정신과도 결부시킨다. 이곳에 이 나무들을 심은 것은 풍수지리학적으로 죽계수와 면하는 평지에 있는 소수서원의 뒤가 허한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서였으며, 이 소나무로 하여 서원은 고즈넉하면서도 넉넉한 분위기를 풍긴다.

 

  그런데, 소나무 숲 한쪽에는 이외로 당간지주가 하나 서 있다. 잘 알다시피 당간지주는 사찰 입구에 세워두는 것으로, 절에 행사가 있을 때 거기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 두는데 이 깃발을 걸어두는 길쭉한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이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이외에도 서원 내에는 아직도 당시 숙수사(宿水寺)의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숙수사는 통일신라 전기에 창건된 사찰로, 고려시대까지 이어져 오다 소수서원의 건립으로 폐사된 듯하다. 보물 제59호 숙수사지 당간지주는 마주보는 면의 바깥면 중앙에 세로띠를 새기고, 꼭대기에서 1.17m 밑에서 부터 2.34m까지 사이가 면이 쑥 들어가 있어서 마치 넓은 홈을 마련한 것처럼 보인다.

 

 네모난 기둥 끝으로 올라가면 약간 가늘어지고, 끝은 둥글게 경사지도록 하였다. 꼭대기 끝 안쪽 면에는 홈을 파서 당간을 고정시키도록 하였다. 원래는 지주와 당간을 받치던 바닥돌이 있었을 듯하나, 현재는 지주 양쪽으로 길고 큰 돌 1장씩이 놓여있을 뿐이다. 전체적으로 소박하며 돌을 다듬은 솜씨도 세련되어 보이는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이다.


   * 경렴정과 은행나무 사이에서 해설사의  설명을 듣는 답사반원들

 

♧ 경렴정과 ‘경(敬)’자 바위


 서원으로 들어가기 전 오른 쪽 은행나무 옆에 오래된 정자가 있는데, 이는 경렴정(景濂亭)으로 유생들이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며, 마음의 여유를 찾던 공간이다. 주세붕 선생이 백운동서원을 건립하면서 지었다고 전해지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정자 중의 하나이다. 그 이름은 북송의 학자 염계 주돈이(濂溪 周敦臣+頁)를 경모하는 뜻에서 호의 첫 글자인 ‘濂’자를, 안향 선생을 높인다는 뜻에서 ‘景’자를 붙인 것이다.

 

 전면 3칸에 측면 1칸의 건물로 우물마루바닥에 4면으로 계자난간을 둘렀으며 일필휘지의 호방함을 느낄 수 있는 경렴정의 초서 현판은 조선 중기 퇴계의 문인인 고산 황기로(孤山 黃耆老)의 글씨다. 서원경내와 외부 자연풍경을 이어주는 사방이 시원하게 트인 경렴정은 원생이나 유림이 모여 시연(詩宴)을 열며 풍류를 즐기고 심신을 고양할 수 있는 중요한 공간이었다. 정자 내부에는 주세붕 선생과 퇴계 선생 등 당대 여러 묵객(墨客)들의 자연을 노래한 시판(詩板)이 걸려 있다. 유유히 흘러가는 죽계수를 끼고 수령 500년의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드리워진 정자는 시공을 뛰어넘어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던 유생들의 풍취가 묻어난다. 경렴정에서 죽계수를 격하여 바라보면 ‘경(敬)’과 ‘백운동(白雲洞)’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돌출된 바위가 있다.

 

 ‘경(敬)’은 성리학에서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여 흐트러짐이 없다(主一無適)’는 의미로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는 수양론의 핵심이 되는 선비들의 지침이며 성인이 되어 가는 지름길과 같아 효경(孝經)과 맹자(孟子)에서는 공경(恭敬)의 뜻으로, 논어(論語)에서는 삼가 근신하는 의미로 풀이했다. 한편 '경(敬)자' 위에 씌어진 ‘백운동(白雲洞)’이란 글씨는 퇴계 이황선생이 새긴 것으로 전해온다.

 

 이 ‘敬’자 바위에는 순흥 땅의 아픈 역사와 얽힌 전설이 서려 있다. 세조3년(1457) 10월 단종 복위 거사 실패로 이 고을 사람들은 정축지변(丁丑之變)이라는 참화를 당하게 되는데 그때 희생당한 순흥도호부민들의 시신은 이곳 죽계천에 수장되고 만다. 그 후 밤마다 억울한 넋들의 울음소리가 들리므로 당시 풍기군수 주세붕 선생이 원혼을 달래기 위해 ‘경(敬)’자에 붉은 칠을 하고, 위령제를 지낸 후로 울음소리가 그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 죽계수 바위에 새겨진 '경(敬)'자 바위

 

♧ 서원의 설립 배경


 순흥문화유적권 홈페이지를 보면, ‘서원(書院)은 조선시대 사림(士林)의 사상적 본거지이자 활동기반으로서 사림의 운명공동체로 강학(講學)과 선현(先賢)의 제향(祭享) 두 기능을 담당했다.’고 나와 있다. 서원은 강학과 제향의 기능을 가진 점에서는 관학(官學)과 차이가 없었지만, 제향의 대상이 공자와 그의 제자인 성현(聖賢)이 아닌 우리나라 선현(先賢)이라는 점과 중앙정부가 아닌 사림이 그 설립 주체라는 점에서 차이를 가지고 있다.


 지방의 향교, 중앙의 사부학당, 성균관으로 이루어진 관학이 중심이었던 조선초기의 교육제도는 중기를 지나면서 세조의 왕위 찬탈반대로 인한 집현전 폐지와 연산군에 의한 성균관의 황폐화 등으로 국가지원의 부족에 부딪치고 결국 관학은 점차 교육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처럼 관학이 학교로서의 교육기능을 상실하게 되면서 학덕을 겸비한 유학자들은 개인적으로 서재(書齋), 정사(精舍) 등의 사학을 설립하여 학문을 보급하고 학문을 계승하였다.


 중종반정 후 중종은 혼란을 수습하고 새로운 정치를 표방하면서 성균관을 중수하는 등 관학을 중심으로 한 교학진흥책을 추진하였지만 기대만큼 효과를 얻지 못하였다. 이에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신진 사림세력은 의리명분을 바탕으로 한 민심수습과 내적 인격도야를 추구하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의 학문풍토를 추구하며 도학(道學)정치에 기초한 교학진흥책을 제시하였다. 그 교학진흥책 중 하나가 바로 문묘종사(文廟從祀)운동이었다.  이는 사림계의 학문적 우위성과 정치입장을 강화해주는 측면과 함께 향촌민의 교화라는 명분을 가지는 것으로서 서원 발생의 토대를 제공하였다. 이후 선조대에 이르러 사림파가 정치 주도권을 잡으면서 서원은 본격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이같이 서원은 도학을 이상으로 삼던 사대부 사림세력들의 정신세계가 반영된 조선시대 유교사회의 대표적 산물이다.


 조선 성리학의 유산인 서원은 선비들이 학문을 연마하고 선현에게 제향을 올리는 곳으로 향촌사회를 이끌어가는 정신적 지주 역할과 후에 지방사림세력의 구심점이 되었으며 나아가 중앙 정치세력의 견제 기반으로서의 기능을 갖게 되었다. 조선 중기 교육적 기능면에서 쇠퇴의 기미를 보이던 관학에 대응하여 새로운 교육활동의 중심지로 부상했던 서원은 과거시험과 법령의 규제에 얽매인 관학과는 달리 학문의 자율성이 존중되어 출세나 공리주의가 아닌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길렀던 민족교육의 산실이자 유교 인재 배출의 요람이었다. 


  * 서원 안에서 해설사의 설명을 듣는 답사반원들 1

 

♧ 최초의 사립대학인 ‘소수서원’


 소수서원은 460년 전통을 자랑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대학이라 할 수 있다. 소백산 자락 영귀봉(靈龜峰) 아래 위치한 소수서원은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신재 주세붕 선생이 백운동서원을 창건한데서 비롯되었다. 고려말 회헌 안향 선생을 흠모하던 주세붕이 풍기 군수로 부임한 이듬해인 1542년(중종37), 안향 선생의 고향에 사묘를 세워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다음해 1543년에는 학사를 건립하여 사원(祠院)의 체제를 갖춘 것이 그 시초이다.

 

 주세붕은 저서 ‘죽계지(竹溪志)’ 서문에서 ‘교화는 시급한 것이고, 이는 존현(尊賢)으로 부터 시작되어야 하므로 안향을 존봉하는 사묘를 세웠고, 겸하여 유생들의 장수(藏修)를 위하여 서원을 세웠다.’라고 하여 사묘와 서원을 세우게 된 동기에 대해 밝히고 있다. 또, ‘백운동서원’이라 이름 한 것에 대해 “왼쪽으로 죽계수가 휘감아 흐르고 오른쪽으로는 소백산이 높이 솟아 구름이며 산이며 언덕과 물줄기가 실로 중국 송나라 때 주희(朱熹)가 재흥시킨 백록동서원이 있는 여산에 못지않다.”고 여겨 그를 본받은 것과 아울러 “하얀 구름이 항상 서원이 있는 골짜기에 가득했기 때문이다.”라 적고 있다.

 

 주세붕이 안향 선생을 배향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 소수서원에는 이후 1544년(중종39)에 안축과 안보가 추가 배향되었다. 1546년(명종1년)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한 안향의 후손 안현의 노력으로 서원의 향사와 토지, 서적의 운용과 관리 등에 관한 서원의 운영방책이 보완되고 경제적 기반도 확충되어 서원은 확고한 기반 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이후 1633년에는 설립자인 주세붕 선생이 소수서원에 추가 배향되었다. 그 후 1548년(명종 3년) 10월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은 백운동서원을 공인화하고 나라에 널리 알리기 위해 1549년 정월에 관찰사 심통원(沈通源)에게 백운동서원에 사액을 바라는 글을 올리고 국가의 지원을 요청했다. “교화란 반드시 위에서 아래로 이어진 이후라야 근본이 있게 되어 장원(長遠)하게 되는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아침에 가득 찼다가도 저녁엔 메말라버리는 근원 없는 물과 같으리니 어찌 오래 갈 수 있겠습니까? 처음 설치된 서원이 마침내 쇠잔해버릴까 두려워 직접 조정에 청원코자 했으나 길이 멀고 말이 미약하여 이루지 못했는데 감사께서 아뢰어 송나라 고사(故事)대로 서적과 편액이며 토지, 노비를 내리게 해주기를 바랍니다.” 

 

 이를 허락한 명종은 대제학 신광한(申光漢)에게 서원의 이름을 짓게 하고 ‘이미 무너진 유학을 다시 이어 닦게 했다(旣廢之學 紹而修之).’는 뜻을 담은 ‘紹修書院’으로 1550년(명종5년) 2월 친필 편액을 하사하고 아울러 사서오경, 성리대전 등의 서적과 함께 노비를 하사했다. 이와 같이 백운동서원이 퇴계 이황에 의해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이 되면서 서원이 성리학의 정통성을 이어가는 학문의 도장으로서 뿐만 아니라 선현의 봉사와 교화 사업을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된다. 이로써 퇴계는 서원이 관학인 향교에 대응하는 공인된 사립고등 교육기관으로 성리학의 실천도장이자 도학의 전당이 되게 하였다.


    * 서원 안에서 해설사의 설명을 듣는 답사반원들 2

 

♧ 소수서원의 배치 구조


 소수서원은 최초의 서원답게 조선 후대의 서원과는 달리 건물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배열된 것이 특징이다. 우선 강당 좌우에 있어야할 동, 서재가 없고 4개의 재실인 일신재(日新齋), 직방재(直方齋), 지락재(至樂齋), 학구재(學求齋)가 독립적으로 산재하며, 다른 서원에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영정각 건물이 있다. 또 후대의 서원처럼 누각이나 정문 같은 별도의 경계 건물도 존재하지 않고 단지 경렴정이란 정자를 세워 후대 서원의 누각이 지녔던 풍류 기능을 대신하였다.

 

 또한 건물들의 배치와 외부 공간 구성에도 일정한 틀을 발견할 수 없다. 정문을 들어서면 측면을 앞으로 하고 있는 강당이 나타나고 경내의 한 구석에 높은 토대 위에 사당이 이루어져 있어 강당과 사당은 각각 남향으로 독자적으로 위치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사당으로 들어서는 문이 일반적인 삼문(三門)의 형태가 아니라 외문으로 된 것도 다른 점이다.

 

 다만 교육기능의 강학당과 제향기능의 사당의 위치는 우리나라 대부분이 따르고 있는 중국식의 전학후묘(前學後廟, 앞은 배움의 공간 뒤는 제향의 공간)의 방식을 택하지 않고, 소수서원은 동학서묘(東學西廟)로서 배움의 공간은 동쪽에, 제향의 공간은 서쪽에 세워 이른바 서쪽을 으뜸으로 삼는다는 우리나라 전통 위치법인 이서위상(以西爲上)을 따르고 있다.

 

 경내의 건물들이 비록 가시적인 질서 없이 배열되어 있지만 그 나름대로 정돈된 통일성을 가지 며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외부마당은 단아한 멋을 느낄 수 있으며, 형편과 필요성에 따라 환경과의 조화를 꾀하며 건물들을 앉혀나간 선현들의 실용적인 정신도 엿볼 수 있다.


  * 서원과 박물관 사이에 세워놓은 정자

 

♧ 소수박물관의 전시물들


 고대로부터 한국인의 정신세계를 지배한 민족의 정신문화인 유교, 소수박물관은 유교와 관련된 전통문화 유산을 체계화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유교의 이상을 간직한 소수서원을 통하여 민족정신의 뿌리를 찾는 민족문화의 전당이다. 이곳은 조선유학의 메카답게 서원과 관련한 귀중한 문화유산과 유학의 전말을 눈으로 체험해 볼 수 있는 국내 유일의 유교박물관이다. 소수박물관은 2004년 9월 22일 개관을 시작으로 영주의 귀중한 유물과 유적을 체계적으로 보존하고 전시함으로써 지역문화의 활성화와 생동감 있는 역사 체험을 위한 공간이다.

 

 기획전시실은 기증유물 전시실로 민족적 자긍심과 향토애의 발로로 고장을 아끼는 분들이 아무 조건 없이 영주시에 기증 또는 기탁해 준 유물들이 2만점에 이른다. 향후 기증유물을 심층 연구하여 학술적 가치를 드높이고, 아울러 연차적으로 순환 전시할 예정이란다. 제1전시실은 ‘역사의 고장 영주’로 선사시대 사람들의 생활, 신앙의 대상지였던 지역이었음을 확인시켜주는 공간이다.

 

 경북 최북단에 자리한 영주는 예로부터 사람이 정착하여 생활하기에 적합한 환경이었으며 고인돌, 선돌, 바위그림 등 청동기시대의 유물이 발견되고 있어,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 조상들이 이 지역에서 생활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삼국시대의 영주를 비롯해 조선시대 문화유적 등 다양한 유물을 전시한 공간이다. 가흥리 바위그림은 청동검의 손잡이 모양과 원형이 연결된 형태의 그림으로 모두 15기가 새겨져있다.  제2전시실은 ‘유교의 전래’를 전시한 공간으로 공자에 의해 개창되어 수천 년 동안 중국, 한국, 일본 등 동양사상을 지배하여 온 철학사상인 유교가 우리지역의 문화형성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지 알 수 있는 공간이다. 그리고 중곡 송(宋)대에 발달한 동국도학(東國道學)의 성립, 수성, 발전과 유교가 우리지역에 어떠한 영향력이 있었는지에 대하여 전시한 공간이다.


제3전시실은 ‘서원과 향교’로 선비들이 모여서 명현 또는 충절로 이름 높은 위인들을 받들어 모시고 그 덕망과 절의를 본 받고자 배움을 익히던 사학기관인 서원과 지방의 유풍(儒風)을 진작시키고 인재양성의 목적을 둔 향교에 대하여 서술한 공간이다. 제4전시실은 ‘소수서원’으로 숙수사지와 소수서원, 신재 주세붕선생의 업적과 소수서원 창건이야기, 사액의 경로, 소수서원에 배향된 인물 등 소수서원과 함께 한 역사를 알 수 있는 공간이다. 


   * 선비촌 초가집1

 

♧ 충효의 현장 ‘선비촌’


 선비촌은 우리 민족의 생활철학이 담긴 선비정신을 거양하고 사라져 가는 전통문화를 재조명하여 윤리도덕의 붕괴와 인간성 상실의 사회적 괴리현상을 해소시켜 보고자 충효의 현장에 재현하게 된 곳이다. 앞으로 소수서원과 연계되는 영주 선비정신의 계승과 이를 통한 올바른 가치관 정립 그리고 역사관 확립을 위한 산 교육장으로 활용될 것이라 한다.


 또 전통문화의 현장으로 선비의 생활상을 이해하는 오감 체험형 전시와 참여형 이벤트, 전통문화 체험의 기회가 수시로 제공되는 선비촌의 각종 기획 프로그램에서 옛 선비들의 당시 생활상을 통해 잊혀져가는 수준 높은 전통문화를 직접 느껴 보게 된다. 부지면적 57,717㎡에 와가 7동 만죽재 고택, 해우당 고택, 김문기 가옥, 화기리 인동장씨 종택, 김세기 가옥, 두암 고택, 김상진 가옥 가옥과 초가 5동 장휘덕가옥, 김뢰진 가옥, 김규진 가옥, 두암 고택 가람집, 이후남 가옥을 재현시켰다.

 

 그 외 정자 1동, 누각 1동, 연자방아 1개소, 물레방아 1개소, 디딜방아 1개소, 산신각 1동, 정려각 2동, 원두막 1동, 곳집 1동, 대장간 1동, 강학당 2동, 강학당 부속채, 초가 2동(음식점), 와가 10동(음식점 4동, 판매장 6동)으로 구성되어 순흥문화 유적권을 형성하고 있다. 또 저자거리가 있는데, 시장, 가게가 쭉 늘어져 격 높은 기념품을 사거나 옛스러움을 그대로 살리면서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이다.


 오랜만에 들른 소수서원은 이제 이렇게 주변을 정비하고 연계된 시설을 갖춤으로서 경쟁력 있는 답사지를 떠나 이름난 관광지로 거듭나고 있었다. 저자거리에서 몇 가지 기념품을 사고 막걸리를 한 잔 마시고는 버스에 올랐다. 모처럼 강원도에서 빼먹었던 영월과 오대산 답사에 덧붙여 이미 모임에서 다녀간 곳을 다시 찾는 것도 쉼 없이 변하는 이런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예정에 없던 이곳을 도는 바람에 시간이 없어 단양8경중의 일부는 다름으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끝)

 

   * 선비촌 초가집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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