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권갑하의 시와 금불초

김창집 2011. 8. 18. 00:33

  

‘역류’ 동인 10주년 기념 시선집

‘13현의 푸른 선율’에 나온

권갑하 시인의 시를 읽고

앞으로 8편을 골라

한라생태숲에서 찍은

금불초와 함께 올린다.

 

권갑하 시인은 1958년 경북 문경 출생으로

1962년 조선일보와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

고려대학교 식량개발대학원 석사과정 수료,

1998년 제17회 중앙시조대상 신인상을 받았다.

시조집으로 ‘세한의 저녁’과 ‘외등의 시간’ 등이 있다.

 

  

 

♧ 숫돌

 

아찔한 날 선 삶을 온몸으로 껴안으며

낫을 갈 듯 살아오신 아버님의 팔순 생애

등 굽어 푹 패인 가슴 허연 뼈로 누웠다

 

-균형을 잘 잡아야 날이 안 넘는 겨

갈무린 기도문인양 깃을 치며 솟는 햇살

하늘빛 흥건한 뼛가루 목숨인양 뜨겁다

 

가슴 마구 들이치던 내 유년의 마른 바람

-물을 자주 뿌려야 날이 안 상하는 겨

촉촉한 귓전의 말씀 눈물 속에 날이 선다.

 

  

 

♧ 종

 

제 몸을 때려 고운 무늬로 퍼져나가기까지는

울려 퍼져 그대 잠든 사랑을 깨우기까지는

 

신열의 고통이 있다

밤을 하얗게 태우는

 

더 멀리 더 가까이 그대에게 닿기 위해

스미어 뼈 살 다 녹이는 맑고 긴 여운을 위해

 

입 속의 말을 버린다

가슴 터엉 비운다.

 

  

 

♧ 괄호 속의 하루

워드프로세서 커서가 하릴없이 숨차다

튕겨지듯 집을 나선 나의 하루는

한 뼘 반 괄호 속에서 쓰고 다투고 돈을 센다.

강은 오늘도 녹조와 적조를 되풀이하고

그리운 사람은 내게서 너무 멀리 있다

오~랜 병 끝에 바라보는 한 폭 담채화처럼.

하루가 쓰레기통 속에 가득 쌓이는 저녁답

조금씩 흔들리는 것들이 아름답다

서랍 속 꿈마저 짐 되는 괄호 속의 하루

 

  

 

♧ 세한의 저녁

공원 벤치에 앉아 늦은 저녁을 끓이다

더 내릴 데 없다는 듯 찻잔 위로 내리는 눈

맨발의 비둘기 한 마리 쓰레기통을 파고든다.

돌아갈 곳을 잊은 사람은 아무도 없는지

눈꽃 피었다 지는 부치지 않은 편지 위로

등 굽은 소나무 말없이 젖은 손을 뻗고 있다.

간절히 기댈 어깨 한 번 되어주지 못한

빈 역사(驛舍) 서성이는 파리한 눈송이들

추스른 가슴 한쪽이 자꾸 무너지고 있다.

  

 

♧ 달

--서울역에서

 

하늘은 비어있고 난 아직 길 위에 있다

몸을 비껴 길 밖의 길 아프게 부랑하던

시간의 잔주름 위를 쓸고 가는 바람소리

 

뜨거운 울음 안고 기울다 차오르는 시간

단물 고인 생각들은 하얗게 말라가고

뉘인가, 어둠에 취해 일행으로 질주하는

 

무언가 말하려다 돌아서는 가로등 밑

흐릿한 밑그림같은 낯익은 뒷모습이

차갑게 떨리는 손엔 때 절은 눈물 한 접시

 

그대, 푸른 강물이 되지 않아도 좋다

진저리나는 여정도 네 꿈의 그림자일 뿐

밤새운 시계탑 위로 은빛 새는 날고 있다.

 

  

 

♧ 우회를 꿈꾸며

 

군자교 지나 길은 인질로 잡혔다

끝은 보이지 않고 되돌아갈 수도 없는

문명에 지친 하루가 빽밀러 속에 갇혀 있다.

지급기한 다 넘긴 주머니 속 어음장처럼

자꾸 눈에 밟히는 새우잠 자는 들꽃들

미풍이 지날 때마다 강도 비늘 벗는다.

벌써 몇 시간째 차선을 앞다투지만

가 닿을 꿈의 자리는 가드레일처럼 구겨져

중량천 검은 가슴 위로 맥없이 떠내려간다.

가장 늦은 귀가에도 가장 먼저 아침을 여는

온몸에 바퀴 자국 어지러운 젊은 가장이여

별은 왜 눈을 감아야만 보이는 것일까.

우회를 꿈꾸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린

핸드폰 밧데리마저 깜박대는 월릉교 부근

그리운 불빛 하나 둘 문을 걸어 잠근다.

 

  

 

♧ 발자국, 발자국들

-― 종로에서

 

다 닳은 지문 위를 종종걸음 치며 가는

오늘 이 미행은 어느 미망의 늪 속인가

수없이 따돌리면서 다시 좇는 이 조바심

 

가쁘게 헤매 돌다 순간 길을 놓쳐버린

엎드려 두 손을 벌린 기진한 눈빛 앞에서

황급히 등을 돌리는 이 무심은 또 무엇인가

 

문득 끊어진 길, 그 긴 아픔에 젖고 싶다

눈밭에 새겨 둔 내 영혼의 하얀 무늬

얼마나 뒤축이 닳으면 그대 앞에 별로 뜰까

 

쉼 없이 허공 속으로 문자를 띄워 보내는

은빛 그리움이여, 지워진 발자국이여

오롯이 어둠을 뚫고 달려오는 늑골 하나

  

 

♧ 외등의 시간

 

울렁이는 욕망들이 굽은 등마다 흘러나오는

지워진 먼 길 끝에선 아우성도 몰려온다

허물을 덮어주려면 몰래 별도 띄워야겠지.

은밀한 갈증들은 발만 동동 구르고

헤진 상처 감추려 지친 바람 분주하지만

실직의 허기진 강은 눈물에도 젖지 않는다.

안간힘으로 굴린 공은 어디로 굴러갔나

홀로 깬 기다림은 파도소리로 훌쩍이는데

쓸쓸한 작별의 행방은 시치미를 떼고 있다.

제 가슴 속 불을 밝혀 외따로 돌아가는

어둠을 건너는 외등의 경건한 고독이여

아득한 혼잣말처럼 문득 빗방울이 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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