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제주한란과 ‘우리詩’ 9월호

김창집 2011. 9. 7. 02:17

 

가을로 접어드는 9월, 생명과 자연과 시를 표방한 시지 ‘우리詩’ 9월호가 나왔다. 인산문학상 제정을 알리는 광고가 실렸고, ‘우리詩 칼럼’에 임보 시인의 ‘좋은 시’란 어떤 글인가, 특별대담(3) ‘시에서 길을 찾다’는 ‘오세영 시인을 찾아서’(대담 박해림/사진 진란), 이달의 우리詩 38인 선은 김여정 이혜선 김복근 장순금 김추인 박승미 김영호 송문헌 나병춘 송영희 박해림 서연정 남유정 박원혜 이규홍 강동수 권혁수 김소원 박희정 송태옥 천외자 권순자 권현수 박지선 서경원 고현수 심성보 박순원 곽구영 정선 신단향 이재부 임미리 조영심 도복희 오승근 이옥 이성혜의 시 각각 2편씩을 실었다.

 

기획연재(3) - 시․ 시인 그리고 사랑은 ‘오르지 못할 산과 같은 스승’ 김구용 시인을 조병기 시인이 썼다. 특별연재(3)은 하종오 시인의 ‘모든 살아가는 것들의 향토사’로 6편의 시가, 기획연재 47 ‘이 詩, 나는 이렇게 썼다’는 손한옥 : 갈기 휘날리며 산을 오르는 이유, 이정란 : 너와의 관계, 나라는 현상, 이용헌 : 산과 장자와 사람과 시를, ‘신작 소시집’은 진란 시인의 ‘혼자 노는 숲’외 4편을, 그리고 부산 시조시인 특집으로 박옥위 백승수 변현상 서태수 손영자 이말라 전연희 전일희 정해송 정해원 주강식의 작품을 실었다.

 

기획연재(5) 시로 쓰는 사계는 ‘홍천강의 가을과 비닐꽃’(정호)을, 영미시 산책(50)은 ‘개에게(조세핀 프레스톤 피바디)’ 백정국 교수의 번역과 해설로 나온다. 지금 한라수목원에는 천연기념물 제191호 제주한란이 피어 향기가 진동한다. 멀친을 씌운 온실 화분에 전시되어 있어 제대로 찍진 못했지만 그래도 향기는 풍기는 것 같아 시 9편을 골라 사진과 함께 싣는다.

 

 

♧ 집만이 집이 아니고 - 오세영

 

출가(出家)라니

정녕 어디로 간단 말이냐.

머리 깎아 바랑메고

산으로 간단 말이냐.

장삼 걸쳐 법장(法仗) 짚고

바다로 간단 말이냐.

바람 따라 향기 좇아 이른 계곡엔

도화(桃花)는 시나브로 꽃잎 지는데

하염없이 개울물은 흘러가는데

강물 따라 소리 좇아 이른 바다엔

파도는 실없이 부서지는데

출가라니

누굴 따라 어디로 간단 말이냐.

집만이 집이 아니고

집밖에 있는 것이 또 집인데

비로봉 만물상 곰바위 밑에

앉은뱅이 민들레나 되란 말이냐.

지리산 세석대 널 바위 밑에

가지 꺾인 소나무나 되란 말이냐.

출가라니

집 밖이 또 집인데

정녕 어디로 가란 말이냐.

 

  

 

♧ 난초를 위한 협주곡 - 이혜선

 

지은 죄가 무섭게 비 쏟아지는 날

난초와 내가

어둑한 집을 지키고 있었다

갑자기 번쩍

우르릉 쾅, 검은 하늘에서 울리는 광시곡에

난초가 움찔 몸을 움추리더니

내 품으로 뛰어들어 안겼다

 

따스한 체온 번지는

협주곡 향기 속에

빗소리 천둥소리 아득히 사라져갔다

 

  

 

♧ 추사, 난 - 박승미

 

추사의 화첩 속

 

물 길 산 길

 

굽이 굽이 돌고 돌아서

 

당도해 보니

 

난 한 촉

 

추상(秋霜) 같으시다

 

말을 잃고

 

행여 그림자라도 밟을세라

 

뒷걸음 쳐 나왔다.

 

  

 

♧ 나의 고향은 7 - 김영호

 

나의 고향은

여름해의 지친 발을 씻겨주고

낮달의 땀이 밴 등을 밀어주던 물고기들

동산의 화초들 들어가 머리를 감고

누나들 가슴띠를 풀어주던 서쪽새

수줍은 얼굴의 냇물, 냇물 마을이었다.

 

흰구름에 악보를 그리며 날던 종달새 울음소리

논둑의 콩알들을 부풀리고

미루나무 키를 높이 키워

나의 두 귀는 그 끝가지에 올라서서

깊은 밤 귀가하는 어머니의 발걸음소리를 기다렸다.

 

풀을 뜯던 어미소를 몰고

마을로 들어온 저녁 종소리

손녀를 앞세운 몇몇 노파를 부축하고

예배당 안으로 걸어 들던 보리꽃 마을.

 

교회 마당엔 늙은 개 한 마리 귀를 세워

울려 나오는 찬송가속 주인의 목소리를 헤아리고

약물내기 연못 개구리 울음소리 밤구름 열어

별들을 떨구던

 

밤이 더 환하던 은하의 마을이었다

나의 고향은.

 

  

 

♧ 금강초롱 - 나병춘

 

물 오른 잎새

연보라빛 초롱

파문 타고 퍼져나가는

해으름 빛

 

푸른 능선 슬며시

열이레 달

밀어 올리는

 

풍경소리보다 작아

이슬보다 더 아득히

더께 낀

눈망울 씻는

 

보보

보보보,

벙어리뻐꾸기 소리

 

  

 

♧ 난蘭 - 박원혜

 

난에 꽃이 폈다

화원에서만 피던 꽃이

내 앞에서 피었다

모시장삼 팔 벌리고

연노랑 고깔모자 쓰고

훌쩍 하늘로 올라갈 듯

홀로 날개짓 한다

내면의 빛깔을

이제껏 감추더니

꽃대도 보이지 않은 채

홀연 피어났다

 

  

 

♧ 주사위 - 이정란

        

        너는 허공을 입방체로 뭉쳐 높이 던진다

       나는 숨겨두었던 사다리의 날개를 펼친다

     너와 난 공중에서 부딪혀 12각형의 별이 된다

        우린 그 별을 복사해 만든 게임으로

          서로에게 도박을 걸지도 모른다

    어둠과 햇살을 가장 단순하게 만든 네 안에

                        규칙은 없다

                6의 발바닥에서 해를 보는 1

                  1이라고 말하고 싶은 2

            날개가 곤충의 불행인 것을 믿는 3

         3의 노래로 타래를 만들어 동굴을 파는 4

매일 눈동자를 갈아 끼우며 남의 서가의 책을 즐겨 읽는 5

   알고 있는 것들의 영혼을 다붓다붓 의인화시키는 6

              6이 모르고 지나간 영혼은

                  온몸을 검게 칠하고

          어긋난 모서리들 속으로 스며든다

       그럴수록 너는 더욱 부드럽게 팽창한다

           육면체 속 알 수 없는 뭉클거림을

                허공으로 높이 던지는 순간

                네 몸은 투명해진다 애당초

                  나는 너를 본 적이 없다

 

  

 

♧ 할미꽃 - 진란

 

매화 피어나고 봄이 지나가고, 여름이오고,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오고,

그 가을도 지나가고, 깊고 긴 겨울이 오고

사는 일이 매양 이렇게 계절의 꽁지를 물고 쫓아가는 일, 붉고 뜨거운 꽃잎

다 지고 나면 백발만 오래도록 휘날리는 것

 

그리곤

바람에 흩어져 날아가 버리는 것

   

 

♧ 그리운 우물 - 박옥위

 

산과 산 사이의 경계는 안개가 가린다. 못 잊을 기억들이 산인 듯

에워싸도 시간의 차창 밖으로 날아가는 새가 있다

 

아득한 경계사이에 그리운 우물 있다. 아직도 날 풍뎅이

수풀 속을 헤매는 날, 한 번씩 물 긷는 소리 첨버덩 들려온다 

 

켜켜이 자란 초록은 첩첩이 깊이 있어, 시정(市政)에 잡힌 생각이

먼지 같다 싶다가도, 풀냄새 안고 돌아와 나는 또 여자가 되고 

 

수묵 담채 진경으로 새 한 마리 돌아온다, 어둠살 지기 전에

날아 앉는 새떼들, 그리움 그 사이 깊어진 우물 하나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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