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름해설사 5기와 같이 군산과 월라봉자락을 다녀왔다.
가을이 되었는 줄 알았는데, 햇볕이 따갑기는 오히려
여름보다 더한 듯, 연신 흘러내리는 땀을 주체할 수
없어 힘들어 한다. 적당한 시간이 흐르자 중간에서 멈
추고 훗날을 기약했다. 점심시간에 소설가 권무일 선생이
작품집 ‘남이장군’을 나누어주었다. ‘의녀 김만덕’에 이어
두 번째 소설이다. 그 나이에 너무 장하다.
한여름 내내 중산간의 풀밭을 장식하면서
지금 와서까지 오름 등성이를 붉게 물들이는
꽃며느리밥풀은 현삼과의 한해살이풀로
높이는 30~50cm이며, 7~8월에 붉은 꽃이
가지 끝에 수상(穗狀) 꽃차례로 피고
열매는 달걀 모양의 납작한 삭과를 맺는다.
♧ 며느리밥풀 꽃 - 권오범
서방님 머슴살이 생이별에
신혼의 단꿈 접고
우렁잇속 시어머니 업시름에도
군색한 살림살이 조리차 하였건만
젯밥이 뜸 들었나 맛본 것이
죽을죄가 될 줄이야
“육시랄 년이 조상 밥 먼저 처먹네,
너 이년 뒈져봐라.”
가탈에 이골이 나 몽둥이 들고
콩 튀듯 하다
들피든 며느리 결딴낸 시어머니
속종 알리려고 환생한 넋이더냐
벌린 입 다물지도 못한 채
피투성이 입술에 묻은 밥풀 두개
원통해서 어쩌나
♧ 며느리밥풀꽃 - 이향지
며느리밥풀꽃!
이 작은 꽃을 보기 위해서도, 나는 앉는다.
바삐 걷거나, 키대로 서서 보면 잘 안 보이는 이 풀꽃들을 더듬어 가는 동안에도, 나는 몇 번인가 끼니를 맞고, 밥상을 차리고, 주걱을 든다.
나는, 이 보라 보라 웃고 있는 며느리밥풀꽃을 밥처럼 퍼담을 수가 없다.
이 꽃들의 연약한 실 뿌리들은, 대대로 쌓여 결삭은 솔잎을 거름으로, 질기게도 땅을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갈맷빛 솔잎들이 걸러주는 반 그늘 속에서, 꽃빛 진한 며느리밥풀꽃이 꽃빛 진한 며느리밥풀꽃을 낳는다. 보라.
통설이 전설을 낳는다. 보라.
며느리배꼽이나 며느리밑씻개 같은 마디풀과의 꽃들이 낮은 땅에서 창궐하는 동안에도, 며느리밥풀꽃들은 작은 군락을 이루어 산등성이를 기어오른다. 보라.
이 긍지만 높은 작은 꽃의 밀실(蜜室)에 닿기 위하여, 벌은 제 무게로 허공을 파며, 더 자주 날개를 움직여야 한다.
보여도 보이지 않게, 스스로 크기와 색깔을 줄여온, 며느리밥풀꽃의 시간들이, 내 이마에 스치운다.
보라. 보라 보라 웃고 있는 며느리밥풀꽃!
♧ 며느리밥풀 꽃 - 槿岩 유응교
욕심이 하늘같고
심술이 놀부 같은
시어머니를 모시고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쉬지 않고 일을 한 저에게
밥이라도 제대로 먹게 했으면
이렇게 되진 안했을 거예요
왜 사람들은 그토록
욕심이 많고 인색할까요.
죽어라 일을 시켜놓고
대우를 제대로 하지 않는
오늘의 현실을 보면
도저히 이해 할 수가 없어요.
꼭 거리로 뛰쳐나와
붉은 띠 두르고 외쳐야하나요?
그토록 먹고 싶은
하얀 쌀밥 한 그릇
마음 놓고 먹어보지도 못하고
굶주림에 시달려 이승을 하직한
제 슬픈 과거를 이제야 고백합니다.
그러나 요즈음 시어머니들은
며느리를 딸처럼 여기고 사랑해 준다니
얼마나 살기 좋은 세상인지요.
언제나 그 사랑 잃지 마셔요. 아셨죠?
♧ 생각에 잠긴 꽃 - 강세화
사람이 반갑기를
더도 말고 저렇기만 하면
운문재 넘으며 석간수 따라가듯
눈빛이 갑자기 선한 모양으로 남을까
솔솔솔 바람이 앉는 노각나무 가지에
생각에 잠긴 듯 하얗게 꽃이 피어
생각에 깊이 잠긴 듯 구름에 기대어
가지에 잎사귀에 지저귀는 소리소문
반기는 마음을 참지 못하는 골물 소리
거기서 우리끼리는 귀엣말을 나누며
사람이 반갑기를
두말 않고 이렇기만 하면
염천을 바라지하는 선선한 꽃을 보며
세상에 어진 모양을 지킬 수는 있을까
♧ 첫사랑 - 김용택
바다에서 막 건져 올린
해 같은 처녀의 얼굴도
새봄에 피어나는 산중의 진달래꽃도
설날 입은 새 옷도
아, 꿈같던 그때
이 세상 전부 같던 사랑도
다 낡아간다네
나무가 하늘을 향해 커가는 것처럼
새로 피는 깊은 산중의 진달래처럼
아, 그렇게 놀라운 세상이
내게 새로 열렸으면
그러나 자주 찾지 않은
시골의 낡은 찻집처럼
사랑은 낡아가고 시들어만 가네
이보게, 잊지는 말게나
산중의 진달래꽃은
해마다 새로 핀다네
거기 가보게나
삶에 지친 다리를 이끌고
그 꽃을 보러 깊은 산중 거기 가보게나
놀랄 걸세
첫사랑 그 여자 옷 빛깔 같은
그 꽃빛에 놀랄 걸세
그렇다네
인생은, 사랑은 시든 게 아니라네
다만 우린 놀라움을 잊었네
우린 사랑을 잃었을 뿐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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