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따라비 오름에 취재 다녀오자는 말에
엊저녁 무조건 OK했는데, 아침에 비가 내린다고 해
안 가나 보다하고 천천히 매운탕 해먹는데, 차가 와
부랴부랴 옷을 차려 입고 오름으로 향했다.
오름엔 지난 태풍 때문에 시원치 못했던 억새가 다지고
철없는 철쭉이 만발하다. 한 바퀴 돌고 전체 사진 찍으러
내려가려는데, 빗줄기가 더 커진다. 그럼 사 가지고 온
달걀 삶은 것이라도 먹고 가자고, 1회용 우의를 입고
쪼그려 앉아 먹는데, 막걸리도 한 잔 없어 목이 멘다.
아무래도 더 큰 비가 내리기 전에 가는 것이 상책이다 싶어
내려와 세 사람 모두가 동의하에 옛 가시초등학교 자리
자연사랑 갤러리에 가서 오랜만에 사진 구경하고
서 관장님에 차 한 잔 얻어먹고 나와 식당에서 돼지고기
구워 먹으며 환담을 나누고 집으로 오다.
♧ 입동(立冬)에 부르는 노래 - 홍수희
겨울이 오려나 보다
그래, 이제
찬바람도 불려나 보다
선뜻 화답(和答) 한 번 하지 못하는
벙어리 차디찬 냉가슴 위로
조금 있으면
희디흰 눈싸라기도
아프게 불어제끼려나 보다
코트 깃을 여미고
멀어지는 너의 등 바라보며
쓸쓸히 찻잔이나 기울이고 있을 나
사랑은 소유가 아닌 까닭을
모를 리 없는 죄 많은 가슴
하, 연약한 미련
장밋빛 뺨이 고운 그대여
너무 쉽게 왔다가 너무 쉽게
떠나 갈 그대여!
다시 또 겨울이 오려나 보다
오거든 다시 가려나 보다
♧ 입동 무렵 - 최영숙
밤비 오려나...... 바람이
별들을 쓸고 가 버린 입동 무렵
연탄은 좀처럼 피지 않는다
한 장 또 한 장의 숯탄을
넣을 때마다 폐광처럼 아뜩한 누짐 속에서
단 한 번의 불길이 확, 일었다 지고
잠시 밝은 매캐함이 눈을 아프게 한다
그렇다 두려운 것은 한밤의 냉기가
등골을 타고 내려오는 절망 때문이 아니다
나 이제 가보지 못한 겨울의 문을 열려 할 때
왜 지나간 추위는 따뜻하게 느껴지는지
가난했지만 두 손으로 받쳐 올리던 국물 사발과
서리김 사이로 보이던 그대 얼굴 있다
마음밭 서성임으로 주저했으나
저렇듯 불씨를 옮겨 붙이려고
먹탄 아래 여생의 캄캄함을 태우면서 혹은
스러지면서 혼자 가는 길 위에서
부르는 사랑노래 무섬증을 밀고 가다 보면
떨어져 쌓인 낙엽무덤 속
두 발을 묻고 싶도록 환해 보일 대도
있는 것이다 밤비 오려는지
별 없는 하늘 고개를 들면
어딜까, 바람이 길을 트는
먼 나라 그 집......
♧ 입동 - 권복례
세월은 그냥 가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내 몸 구석구석
몸살을 앓게 하고
그리고 또 한 살을 먹는 건가
경상도 사투리로 약을 조제하는
그 여자에게로 가는 길목의
가로수 잎이 한 개도 남아있지 않다
늦은 시간까지 운동을 하던 사람들도
모두 떠나버린 시민공원의
적막함,
늘 바라보기만할 때는
그것도 할 수 없는 내가
서럽고 서러웠다
늦은 밤
모두 떠나보내고 빈 가지로 겨울바람을
맞고 서 있는 나무의 추위가
다 내게로 몰려온다
♧ 입동 - 유안진
유랑하는 내 마음
기슭기슭에
무성히 우거진
탐욕의 잡초더미
젊은 날
비린내마저도
무찔러
절대의 왕국은
오고야 말았구나
그리스도
옛 애인이여
막달라 마리아의 상채기마다
눈바람이 일겠지요
얼음꽃도 피겠지요
그 얼마 뒤에
절대의 사랑은
불이 붙을까요.
♧ 입동 부근 - 송종찬
입동이 눈 앞인데 이제야 먼 길을 나서다니
밤나무 잎이 떠가는 냇가에 앉아
협곡을 막 빠져 나온 물살을 바라본다
겨울이 오기 전에 바다에 닿을 수 있을까
잘게 드러난 주름살 창백해진 손과 발
주술사처럼 강기슭마다 물안개를 피워
사람들이 어찌어찌 살고 있는지 저지대의 안부를 물으며
낮은 목소리로 갈대를 흔들고 지나간다
언제 영어의 몸이 될지 내년 봄까지
어디서 얼음의 제단이 될지
이제야 먼 길을 나서다니
절로 막막해지는 늦가을 그림자 속에서
♧ 입동 - 이명기
바람이 몹시 불어 코끝이 어는데,
빈손 쫙 펴 들고 먼 곳을 배경으로 섰습니다.
다 쓰러진 세상엔 더 이상 흔들릴 것이 없습니다.
거울처럼 잘 닦여진 풍경 속으로 자꾸 얼굴 감추는
길을 갑니다. 이 길 끝에는 드문드문 까치밥이 어는
몇 채의 집과 샛강 건너 돌담을 쌓고,
저물 무렵엔 낮은 지붕 위로 저녁 연기가 피어오르는
마을입니다. 몇 남은 잎에 내려온 햇살같이,
기다림이 끓고 있는 곳으로, 이제 한동안
당신을 만날 수 없음을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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