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가만있으니 몸이 찌뿌둥해서 운동 삼아
한라수목원엘 갔는데, 많은 나무의 잎이 졌다.
아직도 남은 고운 단풍잎에 초점을 맞추는데
노루 가족 셋이서 앞을 지나치는데, 관광객이
너무 소리치며 달려오자 뛰어 달아나버린다.
온실에 가서 죽절초 열매나 찍어보자고 했는데
이 털진달래가 곱게 물든 잎보다 더 진한 꽃들을
피웠다. 태풍이 분 뒤에 날씨가 따뜻해지면
잎이 떨어져버린 나무에 꽃이 피든지, 아니면
산철쭉이 철없이 핀 것은 보았는데, 이렇게
곱게 물든 잎에 핀 꽃은 처음이다.
오늘은 소설(小說), 소설은 이십사절기의 하나로
입동이 지나 첫눈이 내린다하여 소설이라 했다.
소설에는 눈이 적게, 대설에는 많이 온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 소설小雪 유감 - 임영준
걸맞지 않아서
사람 사는 세상인가
소설에 제대로 한번
눈가루 비친 적 있던가
들숨 크게 권한 적 있었나
그래도 사람들은 오가는데
기대하는 소식은 깜깜이고
음영만 짙게 깔린다
돌부리라도 차고 싶었는데
핑계가 생겼다
♧ 소설(小雪) - 최재환
방문 굳게 걸어 잠그면
추위도 밖에서 주춤거릴까.
결 고운 조약돌 하나
햇볕 따스한 石床석상에 올려
찻물 끓기를 기다리다.
돌려받은 세월이
삶을 앞지르기 전에
빈손으로 돌앉아도
하늘을 거역지 않고
밀린 빚이나 지워얄 텐데.
온갖 시름이 물속을 어지럽힐 때 쯤
찻잔을 뎊히는 입김처럼
눈발이 가슴을 파고든다.
♧ 소설 - 권오범
가문의 번창 명 받고
소모품으로 태어나
무성하게 경쟁한 추억
제각기 갈무리한 이파리들
이별이라도 섭섭찮도록
성깔대로 하나하나 끌어안고
불콰하게 뭉그적거리던
가을이 갔다
태곳적 약속 앞세워
매섭게 식식거리며
칼같이 들이닥친
동장군 콧김 무서워서
♧ 마른 잎 - 권경업
지쳐 누운 몸으로, 버석버석
조개골 골바람에
몇 마디 기별 전합니다
그대도 나처럼
어깨 시려 잠 못 이룰까요
소설(小雪) 전후 답신이나 받아볼지
혹 싸락눈 진눈깨비라 하더라도
초로(初老)의 근심처럼 깊어 가는 밤
밤새워 그 소식에 얼굴을 묻고
별빛이, 우리 추억의 먼 등불처럼
빛나기를 기대하며
그대의 평안을 빕니다, 부디
그럼 다시 뵈올 날까지 이만 총총
♧ <서시> 농무(農霧) - 정재영(小石)
절기는 소설
이름값이라도 하려면
잔눈이라도 내려야 할 텐데
대륙으로부터는
소식이 없다.
길을 잃고
실종되어 헤매다니는
안개 뭉치가 실타래로 얽혀
강변에서
시간의 꼬리로 방황하는 농무
눈 감고서도
화선지에 그린 듯이
선명히 보이던 것들이
백내장의 백목白目으로 시계를 가리는
안개의 그물에
갇힌 가슴속으로
뜨겁게 젖어 들어오는
열탕 기습기는
무엇을 태우는
內然내연의 불꽃인가.
♧ 햇볕 한 줌을 위하여 - 오창석
창밖으로 은근히 띄우는
시선 끝에는 늘
그리움이 서 있습니다.
소설 무렵,
가느다란 아침 햇발을 움켜쥐고 있는
은행나무 한 그루.
있는 것 다 비우고
그저 홀쭉이 서 있는 초상
하지만 왜 이리도
넉넉하고 빛나 보이는지요.
"나무의 인생 같은 사람의 인생"
전라의 은행나무는
걸치고 있는 것이라곤 햇볕 한 줌 뿐인데
그렇게 얘기합니다.
따뜻한 사람의 나눔을 말합니다.
건네고 보태 주고 덮어 주고
그래도 남는 삶이 있다면,
그리워하고
추억하고
노래 부르라고.
♧ 황국(黃菊) 몇 송이 - 황동규
소설(小雪) 날
엉거주춤 붙어 있는 나라의 꼬리 장기곶
수리중 문 닫은 등대박물관 바깥 절벽 위에서
바람도 제대로 불지 않고
이리 불다 저리 불다
오징어 굽는 아줌마의 눈만 쓰리게 하는
쓸쓸한 잿빛 바다를 한없이 만나보고
돌아오다 무심히 기림사에 들려
고요한 보살상을 만나보고
차 한대 마주 오지 않는 가파른 성황재를 마냥 오르다
찬바람 잿빛 속에 고개 들고 빛나는 황국(黃菊) 몇 송이
눈 저리다.
아 살아 있는 보살상들!
얼은 눈물 조각은 아니겠지,
꽃잎에 묻어 있던
조그만 발광채들.
♧ 싸락눈 내리는 날 - 임수 경
새벽부터 흩날리기 시작한 어제의 조각
동네 녀석들은 쌓이지도 않는 것들을
뭉치려 두 손을 모두고 있는데
손바닥을 하늘로 향해 펼치고
손위의 모든 온기를 거둬드리며
힘껏 장풍(掌風)을 흉내내 본다
살짝 피하며 손위로 착륙하는 조각 ; 방울
떠나버리면 이렇게 쉽게 녹아 없어지는 것일까
후 불어 날리지 못한다면
굳이 얼굴을 가리고 입을 가득 부풀어 올리며
찌뿌릴 필요가 없겠지
소설(小雪)의 날에 낯선 제비 울음소리가 시선을 당긴다
동변상련(同病相憐) ;
초가지붕 처마 밑 미처 떠나지 못한 한 미련한 것이
이른 새끼를 깠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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