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이영춘 시인의 시와 남천

김창집 2011. 12. 18. 00:03

 

  ‘우리詩’ 12월호에는 2011년 제1회 인산문학상에 대한 내용이 실렸다. 이 상은 죽염 발명가이자 한방암의학 창시자인 인산(仁山) 김일훈(金一勳) 선생의 뜻을 기려 사단법인 우리詩진흥회와 지리산문학관이 공동으로 제정한 상이다.

 

  제1회 수상작은 ‘시간의 저쪽 뒷문’으로 이영춘 시인이 뽑혔다. 이영춘 시인은 강원 평창 봉평 출신으로 원주여고, 경희 대학교 동 교육대학원을 졸업했고, 1976년 ‘월간문학’ 신인상 당선으로 등단하여 시집으로 ‘종점에서’, ‘시지포스의 돌’, ‘귀 하나만 열어놓고’, ‘네 살던 날의 흔적’, ‘난 자꾸 눈물이 난다’, ‘그대에게로 가는 편지’, ‘점 하나로 남기고 싶다’, ‘슬픈 도시락’, ‘꽃 속에는 신의 속눈썹이 보인다’, 시간의 옆구리 등이 있다.

 

  시선집으로 ‘들풀’ 등과 수필집 ‘그래도 사랑이어!’외 다수가 있고, 1987년 윤동주 문학상, 같은 해 강원도 문화상, 1994년 경희 문학상, 1999년 충천시 문화상, 2005년 대한민국 향토문학상, 2009년 시인들이 뽑은 시인상 등을 수상했다. ‘우리詩’ 수상자 자선시 10편에서 몇 편을 골라 겨우내 추위를 이기고 주변을 장식하는 남천과 같이 올린다. * 당선작은 16일 이 블로그에 올린 ‘우리詩’ 12월호 기사에 있다.

 

 

♧ 해, 저 붉은 얼굴

 

아이 하나 낳고 셋방을 살던 그 때

아침 해는 둥그렇게 떠 오르는데

출근하려고 막 골목길을 돌아 나오는데

 

뒤에서 야야! 야야!

아버지 목소리 들린다

 

“저어---너---, 한 삼 십 만 원 읎겠니?”

 

그 말 하려고 엊저녁에 딸네 집에 오신 아버지

밤 새 만석 같은 이 말, 그 한 마디 뱉지 못해

하얗게 몸을 뒤척이시다가

해 뜨는 골목길에서 붉은 얼굴 감추시고

천형처럼 무거운 그 말 뱉으셨을 텐데

 

철부지 초년 생, 그 딸

“아부지, 내가 뭔 돈이 있어요?!”

 

싹뚝 무 토막 자르듯 그 한 마디 뱉고 돌아섰던

녹 쓴 철대문 앞 골목길,

가난한 골목길의 그 길이만큼 내가 뱉은 그 말,

아버지 심장에 천 근 쇠못이 되었을 그 말,

오래오래 가슴 속 붉은 강물로 살아

아버지 무덤, 그 봉분까지 치닿고 있다

       (2011. 문학과 창작 가을호)

 

 

♧ 봉평 장날

 

올챙이국수를 파는 노점상에 쭈그리고 앉아

후루룩 후루룩 올챙이국수를

자시고 있는 노모를 본다

정지깐 세간사 뒤로 하고

한 세기를 건너와 앉은

푸른 등걸의 배후,

저문 산그림자 결무늬로

국수 올들이 꿈틀꿈틀

노모의 깊은 주름살로 겹치는

허공,

붉은 한 점 허공의 무게가

깊은 허기로 내려앉는

한낮.

       (‘현대시학’ 20011년 3월호)

 

 

♧ 방房의 이중법

 

때로 방안에 가만히 누워 있을 때면 마치 내가 관속에 누워

있는 듯한 착각이 들 때가 있다. 관속 천장에서 들리는 소리,

소리들의 방출, 째깍째깍 초침 돌아가는 소리, 내 맥박 뛰는

소리, 물 흐르는 소리, 창 틈새로 햇살 지나가는 소리, 얼마 전

이 지상의 문을 닫고 떠난 한 시인의 눈물 흐르는 소리, 그

눈물에 젖어 드는 잔디, 검은 잔디의 묘지, 묘지의 뚜껑이 열리

는 소리, 그 문으로 또 누군가가 들어가는 소리, 소리들의 정적,

화들짝 놀라 ‘의식’이라는 거울 조각을 흔들어 깨고 나와 보니

나 곰인형처럼 방 한가운데 동그랗게 누워 있다.

동그란 형광등 눈알이 목사님의 그윽한 눈빛처럼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다.

내가 관인지 관이 나인지 알 수 없는 장자의 나비처럼, 그렇게

       (‘우리詩’ 2010년 1월호)

 

 

♧ 무無의 말

   - 선시의 회통, 주제 발표를 들으며

 

사람들 모여 앉아 말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들어간 말들이 회통回通하여 저 창밖 소나무 가지에 걸린다

걸린 말들이 다시 돌아와 나와 풍경처럼 앉아 있는 사람들의 머리카락 뿌리에 박힌다

한 마리 새, 두 마리 새, 여러 마리의 새들의 새들이 공空을 난다

누구의 것도 아닌 공의 공간에

누구의 것도 아닌 공의 말이

 

말은 말 너머에 있다는 공의 공간에.

       (계간 ‘애지’ 2008년 겨울호)

 

 

♧ 만해마을에서의 하룻밤 1

 

큰 산이 나를 안고 잠을 잤다

 

나는 밤새 그의 품속에서

 

하얗게 설레였다

 

몇 억 겁이나 흐르면

 

그를 닮은

 

큰 아이 하나 낳을 수 있을까

       (계간 ‘유심’ 2004년 여름호)

 

 

♧ 오줌발 별꽃무늬

 

한 때는 아주 잘 나가던 중앙 모 일간지 기자님, 나는 님이라 부른다.

나이로는 선배니까……

그 기자, 여러 명이 어찌어찌 화합하다가 노래방을 갔다. 가자마자

화장실에 들락날락, 출입이 잦다.

우연히 아주 우연히 눈에 띈 별꽃무늬,

지퍼 앞문에 흥건히 새겨진 오줌발 꽃무늬, 그 무늬 고운 꽃잎,

정작 본인은 그 꽃잎 그려진 줄도 모르고 ‘봄날은 간다 봄날은 간다’

를 목청껏 소리 높이 부른다.

목청 속에 묻어나는 그 쓸슬한 마이너, 봄날은 간다 봄날은 간다

날은 저물고 ,

지퍼 앞섶에 그려진 오줌발 꽃무늬, 봄날은 가고,

별꽃 무늬, 젊은 날의 꽃잎 지는 소리, 그 소리 서럽게 핀다.

얼룩지는 꽃무늬, 저 오줌발 무너지는 소리.

       (계간 ‘불교문예’ 2009년 겨울호)

 

 

♧ 공空

 

가슴에서 소리가 난다

목탁처럼 울리는 공, 공, 공,

오백 년 전 세世,

아득한 그곳에서도

소리가 났다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소헌왕후의

곡哭 소리다

       (계간 ‘정신과 표현’ 2009년 1/2월호)

 

 

♧ 들풀 1

 

세상이 싫고

괴로운 날은

바람 센 언덕을 가 보아라

들풀들이 옹기종기 모여

가슴 떨고 있는 언덕을.

 

굳이 ‘거실’이라든가

‘식탁’이라는 문명어가 없어도

이슬처럼 해맑게 살아가는

늪지의 뿌리들.

때로는 비 오는 날

헐벗은 언덕에 알몸으로 누워도

천지에 오히려 부끄럼 없는

샛별 같은 마음들.

 

세상이 싫고

괴로운 날은

늪지의 마을을 가 보아라

 

내 가진 것들이

오히려 부끄러워지는

한 순간.

       (‘월간문학’ 1987년 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