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녀석은 지구온난화와 친해졌는지
햇볕만 조금 났다하면 기지개를 펴고
남국의 나무들 모양 파닥거린다.
그러나 눈 내린 한라산 기슭, 나무 아래에
자리한 놈들은 조금만 추었다 하면
바짝 엎드리면서 잎을 마주 접는다.
사람 같으면 추우면 춥다고 유난히 엄살떨고
더우면 덥다고 그늘로 뛰어갈 놈들이다.
한라산에선 너무 많아 눈에 들지도 않는 대신
지리산에선 귀한 몸으로 명품 대접 받는다는데….
♧ 겨울의 꿈 - 가영심
오, 튼튼한 심장의 실패에다 감아 줘.
실낱같이 여려만 가는
세월 속의 나를
더 단단한 끈으로 감기게 해줘.
어둔 기억 꾹꾹 눌러 지워 보면
끝없이 비어 있는 世上.
모질게 뼈만 남은
생목 껍질만 벗기면서
묵묵히 적막으로 보내야 했어.
왜 우리들의 잠은
갈수록 더 깊어지질 않는지.
끝내는
흰 눈 덮인 침묵처럼 몸을 눕히고
얼어붙는 시대의 우울한 꿈이여.
빈 가슴에 불이 일어
불이 되어 타는
질긴 쇠사슬 끌며 따라오던
비친 방랑기.
문마다 꼭꼭 걸어 잠가도
녹슬은 바람 핏줄 속에서
피묻은 시간의 상처는
잉잉대고 있었어. 온 겨울내내.
♧ 우리 앞의 겨울 - 감태준
길 막고 가로누워 있는 산
골짜기에
발소리 죽이고 몰려다니는 가랑잎
산 밖에도 산이 가로누워 있다, 보이는 것은 비탈에 뼈 묻고 떠는 나무들, 한 떼의 연기 낀 바람에 혼(魂)인 잎 쫓겨 발아래 깔린 우리들도 쫓겨,
아직 덜 꺾인 패랭이, 혹은 갈대에게도 매달려 몸 사리는 새 끝내 이 산에서 저 산으로, 저 산에서 저 산으로 새끼 물고 떠다니는 열두 달 겨울, 방금 샛길로 나간 무리도 눈물짓고 돌아와 같이 눈을 받는다
눈이 웃는다 허옇게 웃는 주봉(主峰) 아래 엎드리고 둘러선 돌산도 웃어, 더불어 막막히 웃는 무리, 틈틈이 웃지 않는 놈도 있다, 마른가지에 둥지 틀고 울 것은 울어,
산골에 간간 겁 없이 얼룩지는 울음, 위에 눈은 여전히, 아직 이른 눈발까지 웃고 있다 밤이 깊었다, 자 이젠 갑시다, 우리는 어느덧 길 없이도 뿔뿔이 헤어진다
‘밤새 안녕들, 다시 만납시다’
♧ 빈자일기 - 강은교
우리는 언제나 거기서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혀와 혀를 불
붙게 하며 눈물로 빛과 빛을 싸우게 하며 다정한 고름 고름 속
에 오래 서 있은 허리를 무너지게 하며, 황사 날아가는 무덤 가
장자리에서.
그곳 천정은 불붙은 태양이었고 바닥은 썩은 이빨의 늪이었다.
싸우는 이마 갈피로 등뼈 갈피 갈피로 언제나 종이 울렸다 식사
시간을 알리는 종이. 언제나 종이 울렸다 황혼을 알리는 종이.언
제나 종이 울렸다 임종을 알리는 종이. 그러나 시간은 언제나 그
보다 먼저 흘러갔다. 늦은 손목 눈짓 사이에서, 번쩍이는 번쩍이
는 허리며, 황금 돛대들 사이에서 흘러가고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 돌아오지 않았다. 누군가 굳은 피 한 점 던질 때까지, 누
군가 쓸데없는 제 죽음 하나 내버릴 때까지, 우리가 헌 그 죽음
입고 검은 종소리 한 겹 듣지 않을 때까지.
아아 돌아오지 말라 사랑하라, 그대 아버지가 그대에게 앵기는
독, 그대 나라가 그대에게 먹이는 독, 물의 독, 공기의 독, 흙의 독.
다만 우리는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여기서. 한 고름에 다른
고름을 접붙이며 즐겁게 즐겁게, 할 일은 그뿐, 구걸하고 시들어
구걸하는 일뿐, 그러므로 결코 일어서지 않았다, 잠들지도 않은 채
♧ 겨울 강가에서 - 김경미
눈과 함께 쏟아지는
저 송곳니들의 말을 잘 들어두거라 딸아
언 강밑을 흐르며
모진 바위 둥글리는 저 물살도
네 가슴 가장 여린 살결에
깊이 옮겨두거라
손발 없는 물고기들이
지느러미 하나로도
어떻게 길을 내는지
딸아 기다림은 이제 행복이 아니니
오지 않는 것은
가서 가져 와야 하고
빼앗긴 것들이 제 발로 돌아오는 법이란 없으니
네가 몸소 가지러 갈 때
이 세상에
닿지 않는 곳이란 없으리
♧ 그리운 댓바람소리 - 김경윤
- 김남주시인 생가에서
쓸쓸한 마음 달랠 길 없는 날이면
뜨거운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리워
봉학리 남주형 집에 간다
덕종이형은 또 어느 집회에 갔는지
빈집처럼 고적한 마당귀
장독대에 쑥부쟁이만 우북하다
그늘 깊은 뒤란에는
살아생전 시인의 죽창이 되고
서슬 푸른 칼날이 되었던 청대나무와 조선솔이
여즉도 푸른 날을 세우고 있다
한때 군불을 지피며 하이네와 네루다를 읽었다던
그러나 지금은 곰팡내 나는 행랑채 빈방에서
늙은 농부의 축 처진 뱃가죽처럼 너덜거리는
흙벽을 마주하고 앉아
청송녹죽(靑松綠竹) 가슴에 꽂히는*
그러나 이제는 아무도 부르지 않는
그 노래를 홀로 불러본다
어두운 골방에서 제 핏줄 같은 실을 뽑아
집을 짓는 거미처럼 혼신의 노래를 부르던
순결한 그 사내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거미줄만 가득한 그 빈방에서 한참을 앉았다가
저 멀리 두륜산 갈매빛 능선 위로 떠오르는
한 별을 오롯이 바라보다 대문을 나서는데
뒤란 대숲의 칼칼한 댓바람소리가 자꾸만
힘없이 돌아서는 내 발목을 후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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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주의 시 「노래」중에서
♧ 겨울 기도 - 김광선
오! 나의 겨울밤은 하얗게 잠들지 않는다. 이런 밤이면 나는 은밀한 기도를 드린다.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를 기도의 창(窓)을 통해 들여다 보면 가난한 사람들이 떨면서 기도하는 모습이 보인다. 슬픈 사람들은 겨울밤을 어떻게 기도로 견디는 것일까? 바람은 매섭고 가난이 너무 깊어 차라리 호흡이 끊기기를 기도하는 자들을, 오! 주여 보소서! 그리고 가난한 어느 동네 어느 골목으로 오소서! 추위에 떠는 자들에게 소망이라도 심으소서! 당신의 손길이 닿으면 치유되는 마음의 병을 안고 이 겨울밤을 떨면서 기도하는 자들을 보소서. 오! 주여, 겨울바람은 차갑고 당신은 내게 침묵하시니 불면의 밤을 기도로 견디옵니다. 하늘을 보아도 온통 바람뿐이고 간간이 구름 사이로 별 하나가 보입니다.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과 꿈을 익히는 겨울밤의 기도가 이제 나로 하여금 잡초처럼 겨울을 견디게 합니다. 그리하여! 겨울밤 기도가 깊어지면 내가 잠들고 마는 것은 당신의 은총이 함박눈처럼 내 마음을 하얗게 덮어버리기 때문입니다.
♧ 겨울숲 - 신경림
굴참나무 허리에 반쯤 박히기도 하고
물푸레나무를 떠받치기도 하면서
엎드려 있는 나무가 아니면
겨울숲은 얼마나 싱거울까
산짐승들이나 나무꾼들 발에 채여
이리저리 나뒹굴다가
묵밭에 가서 처박힌 돌멩이들이 아니면
또 겨울숲은 얼마나 쓸쓸할까
나뭇가지에 걸린 하얀 낮달도
낮달이 들려주는 얘기와 노래도
한없이 시시하고 맥없을 게다
골짜기 낮은 곳 구석진 곳만을 찾아
잦아들 듯 흐르는 실개천이 아니면
겨울 숲은 얼마나 메마를까
바위틈에 돌틈에 언덕배기에
모진 바람 온몸으로 맞받으며
눕고 일어서며 버티는 마른 풀이 아니면
또 겨울숲은 얼마나 허전할까
♧ 겨울나무 - 도종환
잎새 다 떨구고 앙상해진 저 나무를 보고
누가 헛살았다 말하는가 열매 다 빼앗기고
냉랭한 바람 앞에 서 있는
나무를 보고 누가 잘못 살았다 하는가
저 헐벗은 나무들이 산을 지키고
숲을 이루어내지 않았는가
하찮은 언덕도 산맥의 큰 줄기도
그들이 젊은날 다 바쳐 지켜오지 않았는가
빈 가지에 새 없는 둥지 하나 매달고 있어도
끝났다 끝났다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
실패했다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
이웃 산들이 하나씩 허물어지는 걸 보면서도
지킬 자리가 더 많다고 믿으며
물러서지 않고 버텨온 청춘
아프고 눈물겹게 지켜낸 한 시대를 빼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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