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많은 무꽃인데
밭 구석에 심어놓은 몇 안 되는
무꽃에 포커스를 맞춘다.
꽃도 보잘 것 없고
낮이 되어 말라버린 것들을 그렇게
소중한 듯 찍는 나를 보며
옹색하다고 할지 모른다.
조금만 시간을 내어 마음먹고
교외로 나간다면
풍성한 무꽃을 볼 수 있겠지만
내가 하는 일성머리가 그렇다.
그렇게 살아왔다
♧ 무꽃 - 김선우
집속에
집만한 것이 들어있네
여러 날 비운 집에 돌아와 문을 여는데
이상하다, 누군가 놀다간 흔적
옷장을 열어보고 싱크대를 살펴봐도
흐트러진 건 없는데 마음이 떨려
주저앉아 숨 고르다 보았네
무꽃,
버리기 아까워 사발에 담아놓은
무 토막에 사슴뿔처럼 돋아난 꽃대궁
사랑을 나누었구나
스쳐지나지 못한 한소끔의 공기가
너와 머물렀구나
빈집 구석자리에 담겨
상처와 싸우는
무꽃
♧ 무꽃 - 박후식
그녀의 밭에는 무꽃이 피어 있다
가꾸지 않아도 텃밭을 끌어와 혼자서 피고 진다
고놈의 첫사랑 때문일까
달밤이면 죽도록 슬퍼서 저희들끼리 엉켜 보듬고 있다
밤새라도 울고 갈 양이면
밭 언저리에 배내옷 눈물이라도 흘리고 갈 양이면
무밭은 온통 바다가 된다
아침에 보면 무밭은 유산한 그녀처럼 몸져누워 있다
♧ 무꽃 - 장석남
혼자 한 번 간 길도 길일까
무꽃이 피었습니다 하고 몰래 숨어 가는 길
혼자 한 번 가는 길 남들 다 자리잡고
피었다가 간 언덕 아래 깃발도 없이
깃대도 없이
몸뚱이 하나로 당도하는 늦은 봄의
저 혼자 오는 가슴을
우 우 ------ 화염병처럼
무밭에 피었다
앞뒷길 모두 풀과 나무의 푸른 바리케이드로 막힌
곳에서 성스러운 늦은 봄을 위하여
숨가쁜 며칠을 살고 혼자 가는 길
아무도 걷지 않는 길
도 길일까
나의 노란 고름들이
늦봄을 이끌고 어디 어디로 간다
♧ 무꽃 - 임연
너른 밭
잘난 무 솎아내고
내버려진 무청 더미에
아기 미소 같은 천진함이 피었다
산에서 내려와
들판을 어슬렁거리는 바람은
찢긴 울음을 내며
먹잇감을 찾고
풍만한 여유를 만끽한 지 오래
스스로 움츠려 밖으로 밖으로
밀어 올리는 펑퍼짐한 엉덩짝에
희생을 두른 주름
어머니가 이랬으리
살갗에 굵은 주름이 져도
아파하지 않고 기뻐하며,
무꽃을 보면
주름진 산골짜기 마른 삭정이처럼
푸석한 밑동이 그려진다.
♧ 무꽃 - 김동호
썩은 무, 버릴까 하다가
썩은 부분 도려내고 남은 부분
접시에 담아 부엌창틀에 놓아두었더니
여러 날 침묵 끝에 푸른 빛
돌기 시작했다
열흘이 지나고 보름이 지나고 이젠
하루가 다르게 푸르름 더해가는 무잎
여덟 줄기 열 줄기 뻗어오른 녹색의 승리위에
오늘은 보라빛 花冠이 올랐다
꽃송이 하나하나가 완전한 작품이다
꽃잎 넷이 우윳빛 보드라움으로 피어오르다가
끝에 가선 연보라 빛 테를 두르고 중앙
한가운데 노란 꽃술을 앉혔다
꽃 축에 들지도 못하는 무꽃이지만
꽃이라는 이름 자체가 황송스런 무꽃이지만
어느 왕관이 이 보다 아름다울 수 있을까
으젓한 저 자태며 층층의 우아함이며
끝없이 줄지어있는 에머럴드 씨방, 허리에 등에
겨드랑이에 거느린 사랑의 풍요로움이며
젖은 빛 따사로움이며…
“어떤 왕관이 이 겨울
어둡고 침침한 이 북창을
이처럼 환히 밝혀줄 수 있을까
어떤 금관이 村婦촌부의 가난한 가슴에
이처럼 아름다운 빛을 注射할 수 있을까”
오늘 아침 무꽃이 무꽃에게 물을 주는 동안
나는 이런 생각에 젖는다
♧ 무꽃 - 김용락
봄날에
녹평 사무실에서 건너다 뵈는
뒷산비알의 노란 무꽃을 보면서
세상일에 너무 쉽게 화낸 자신을 뉘우친다
지켜보는 이 없이도
꽃들은 저리도 타오르는데
채마밭 같은 고향에서 튕겨나와
도시 외곽을 전전하면서
누군가를 섣불리 사랑하고
또 성급히 아파한 마음의 골짜기엔
산새 소리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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