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디카 일기

무꽃 사랑에 빠지다

김창집 2012. 4. 26. 00:33

 

그렇게 많은 무꽃인데

밭 구석에 심어놓은 몇 안 되는

무꽃에 포커스를 맞춘다.

 

꽃도 보잘 것 없고

낮이 되어 말라버린 것들을 그렇게

소중한 듯 찍는 나를 보며

옹색하다고 할지 모른다.

 

조금만 시간을 내어 마음먹고

교외로 나간다면

풍성한 무꽃을 볼 수 있겠지만

내가 하는 일성머리가 그렇다.

그렇게 살아왔다  

 

 

♧ 무꽃 - 김선우

 

집속에

집만한 것이 들어있네

 

여러 날 비운 집에 돌아와 문을 여는데

이상하다, 누군가 놀다간 흔적

옷장을 열어보고 싱크대를 살펴봐도

흐트러진 건 없는데 마음이 떨려

주저앉아 숨 고르다 보았네

 

 

무꽃,

버리기 아까워 사발에 담아놓은

무 토막에 사슴뿔처럼 돋아난 꽃대궁

 

사랑을 나누었구나

스쳐지나지 못한 한소끔의 공기가

너와 머물렀구나

빈집 구석자리에 담겨

상처와 싸우는

무꽃   

 

 

♧ 무꽃 - 박후식

 

그녀의 밭에는 무꽃이 피어 있다

가꾸지 않아도 텃밭을 끌어와 혼자서 피고 진다

고놈의 첫사랑 때문일까

달밤이면 죽도록 슬퍼서 저희들끼리 엉켜 보듬고 있다

밤새라도 울고 갈 양이면

밭 언저리에 배내옷 눈물이라도 흘리고 갈 양이면

무밭은 온통 바다가 된다

아침에 보면 무밭은 유산한 그녀처럼 몸져누워 있다   

 

 

♧ 무꽃 - 장석남

 

혼자 한 번 간 길도 길일까

무꽃이 피었습니다 하고 몰래 숨어 가는 길

혼자 한 번 가는 길 남들 다 자리잡고

피었다가 간 언덕 아래 깃발도 없이

깃대도 없이

몸뚱이 하나로 당도하는 늦은 봄의

저 혼자 오는 가슴을

우 우 ------ 화염병처럼

무밭에 피었다

앞뒷길 모두 풀과 나무의 푸른 바리케이드로 막힌

곳에서 성스러운 늦은 봄을 위하여

숨가쁜 며칠을 살고 혼자 가는 길

아무도 걷지 않는 길

도 길일까

나의 노란 고름들이

늦봄을 이끌고 어디 어디로 간다

     

 

♧ 무꽃 - 임연

 

너른 밭

잘난 무 솎아내고

내버려진 무청 더미에

아기 미소 같은 천진함이 피었다

 

산에서 내려와

들판을 어슬렁거리는 바람은

찢긴 울음을 내며

먹잇감을 찾고

 

풍만한 여유를 만끽한 지 오래

스스로 움츠려 밖으로 밖으로

밀어 올리는 펑퍼짐한 엉덩짝에

희생을 두른 주름

 

어머니가 이랬으리

살갗에 굵은 주름이 져도

아파하지 않고 기뻐하며,

 

무꽃을 보면

주름진 산골짜기 마른 삭정이처럼

푸석한 밑동이 그려진다.   

 

 

♧ 무꽃 - 김동호

 

썩은 무, 버릴까 하다가

썩은 부분 도려내고 남은 부분

접시에 담아 부엌창틀에 놓아두었더니

여러 날 침묵 끝에 푸른 빛

돌기 시작했다

 

열흘이 지나고 보름이 지나고 이젠

하루가 다르게 푸르름 더해가는 무잎

여덟 줄기 열 줄기 뻗어오른 녹색의 승리위에

오늘은 보라빛 花冠이 올랐다

 

꽃송이 하나하나가 완전한 작품이다

꽃잎 넷이 우윳빛 보드라움으로 피어오르다가

끝에 가선 연보라 빛 테를 두르고 중앙

한가운데 노란 꽃술을 앉혔다

 

 

꽃 축에 들지도 못하는 무꽃이지만

꽃이라는 이름 자체가 황송스런 무꽃이지만

어느 왕관이 이 보다 아름다울 수 있을까

으젓한 저 자태며 층층의 우아함이며

끝없이 줄지어있는 에머럴드 씨방, 허리에 등에

겨드랑이에 거느린 사랑의 풍요로움이며

젖은 빛 따사로움이며…

 

“어떤 왕관이 이 겨울

어둡고 침침한 이 북창을

이처럼 환히 밝혀줄 수 있을까

어떤 금관이 村婦촌부의 가난한 가슴에

이처럼 아름다운 빛을 注射할 수 있을까”

 

오늘 아침 무꽃이 무꽃에게 물을 주는 동안

나는 이런 생각에 젖는다   

 

 

♧ 무꽃 - 김용락

 

봄날에

녹평 사무실에서 건너다 뵈는

뒷산비알의 노란 무꽃을 보면서

세상일에 너무 쉽게 화낸 자신을 뉘우친다

지켜보는 이 없이도

꽃들은 저리도 타오르는데

채마밭 같은 고향에서 튕겨나와

도시 외곽을 전전하면서

누군가를 섣불리 사랑하고

또 성급히 아파한 마음의 골짜기엔

산새 소리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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