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촉이 땅을 적시는 비가 오고 있다.
얼마나 가물었는지
가는 곳마다 말라 죽어가는 나무가
걱정이더니, 시원하다.
어제 일요일 야외 행사를 무사히 끝냈으니
이제 비가 와서 문제될 것은 하나도 없다.
오늘은 전에 찍어두었던 병솔나무 꽃에
정드리문학동인지 ‘붉은발 말똥게’에서
올리다 남은 시 중에서 다시 5편을 골라
같이 올린다.
♧ 가랑잎 판화 - 유재영
Ⅰ.
적막이란 적막들 모두 다 갉아 먹은
깡마른 벌레소리 오도독 씹히는 밤
내일은 적멸궁寂滅宮 앞에 열매 한 개 더 붉겠다
Ⅱ .
생각도 깊어지면 감물이 드는 갑다
빈 찻잔에 가라앉은 가랑잎 맑은 소리
닫힌 창 방긋이 열고 별빛까지 섞어보자
Ⅲ .
숨겨온 흰 종아리 명아주 대궁 같은
손닿으면 울 것 같아 비워 둔 그 자리에
누구냐, 달빛 가르며 길을 내는 저 사람은
♧ 능소야, 능소 - 윤금초
속울음
붉디붉게 퍼 올리는
능소凌霄야,
능소
애닯게 잉잉거리는
호박벌
늦은 젖 물리고
세상에!
눈먼 돌부처를
툭, 툭
깨운
저 능소야.
♧ 짐 - 이정록
--어머니학교 42
기사양반,
이걸 어쩐댜?
정거장에 짐 보따릴 놓구 탔네.
걱정마유. 보기엔 노각 같어두
이 버스가 후진 전문이유.
담부턴 지발. 짐부터 실으셔유.
그러니께 나부터 타는 겨.
나만한 짐짝이
어디 또 있간디?
그나저나
의자를 몽땅
경로석으로 바꿔야것슈.
영구차 끌듯이
고분고분허게 몰어.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고분이니께.
♧ 공은 늘 멀리 달아난다 - 이정환
1
40밀리그램 흰 공이다 달이다 달빛이다
깔깔, 깔깔거리며 멀리 달아나고 있다
이따금 금 가버리면 곧장 가라앉는 달
달이다 달무리다 두들겨 맞고 싶지 않아
연신 깔깔거리며 구석으로 달아나는 달
쫓다가 밟혀버리면 짓이겨져 우는 달빛
2
공은 늘 네게서 멀리 달아나버린다
밤새 흩뿌려지던 메밀꽃밭 저 달빛
멀뚱한 네 곁을 떠나 홀연 사라져 가듯
♧ 알 - 이지엽
물방울 한 끝이 둥글게 팽창하다가
여릿여릿 한 쪽으로 고개를 내민다
움켜쥔 주먹 속 눈물
눈시울이 붉어진다
풀면 죄다 죄(罪)가 될 말, 이리 많았던 게야
모두 쏟아내고 기꺼이 죽는 연어처럼
장엄한 다비의 말씀들
검은 씨앗의 별이 뜨고
으밀아밀 와이퍼 하나 쓰윽 지나가고
애써 끌고 온 길이 일시에 지워진다
햇살에 빛나는 차창
하얗게 빈 목구멍 그늘
호밀밭 휘파람처럼 작고 둥근 소리들이
깨끗하게 지워진 자리, 너를 다시 품고 싶다
순결한 가난한 기도가
겨울 문 앞 맑아지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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