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강원호의 시와 물양귀비

김창집 2012. 6. 24. 00:45

  

어제 모처럼 오름 강좌가 없는 토요일이어서

좀 늦었지만 날을 잡아 가족 묘지에 봄 벌초를 하고

오다가 애월읍 상가리 고내봉 입구 조그만 연못에

하나 가득 피어 있는 이 물양귀비를 찍고 왔다.

 

부랴부랴 샤워를 끝내고 12시부터 시청 앞 다방에서 열리는

강원호 제3시집 ‘서귀포에는 불알이 없다’ 출판기념회에 갔다.

끝나고 뒤풀이 때, 이 시집을 만든 세림출판사 임태수 사장과

오랜만에 만난 정인수 선생님과 소주 한 잔 했다.

 

옛날 연극할 때 같이 했던 동료였던 정인수 선생님이

있는 돈을 다 털어 글을 쓰라고 원고지를 사줬기 때문에

시인이 되었다는 애월읍 상가리 출신의 강원호 시인,

마침 그 동네에서 찍어온 물양귀비 사진과 함께

시집 속의 시 몇 편 골라 싣는다.  

 

 

♧ 詩作 노트를 代身하여

 

詩人으로 살기 위하여

펌프질을 쉬지 않고 해왔습니다.

 

하마터면 놓칠 뻔한 詩人의 길.

나에게 위안이 되어준 詩들이 있어

놓치지 않고 선택한 길.

어깨에 가락을 싣고 해학과 풍자도

재미있을 것 같고 달빛 흐린 날

명상과 사색도 멋들어질 것 같습니다.

 

이제야 말로 詩를 길잡이 삼아,

뚜벅뚜벅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2012년 5월 일

강원호  

 

 

♧ 나의 序詩

 

다 헐어 떨어진 옷을 입은 자가 산길을 오르고 있다.

다 헐어 떨어진 옷을 입은 자가 무슨 사연으로

산길을 오르는지는 모르지만

뒤 따르던 산새들 지쳤는지 나뭇가지에 주저앉는다.

 

다 거덜 난 가슴을 가진 자가 산길을 오르고 있다.

다 거덜 난 가슴을 가진 자가 무슨 사연으로

산길을 오르는지는 모르지만

뒤 따르던 바람 지쳤는지 숨을 헐떡이며 흩어진다.

 

저 산길 벗어나면 적막강산 혼자일 텐데

뒤 따르던 것들 마음 돌려 모두 돌아서고 나면

저 혼자 외로운 길 위에 나그네로 세상을 등질 텐데

 

이 귀퉁이에 찢기고 저 모퉁이에 뜯겨

온전한 것 하나 없는 자가 산길을 오르고 있다.

악마 같은 세상 정붙일 곳 없다며 산길을 오르고 있다.  

 

 

♧ 궁금타!

 

인간은 왜 모두 주검을

地面보다 낮은 곳에

묻으려 하는가.

 

어찌 자신의 죽음까지도

낮은 자리에

위치하려 하는가.

 

그보다 더 내려가면,

거기는 어디일까?

궁금타!  

 

 

♧ 서귀포에는 불알이 없다

 

이중섭의 덩치 큰 게들이

집게발을 가진 서귀포의 게들이,

무엇인가 물고 바다 위로 떠오르다가,

다시 바다 속으로 들어간다.

무엇일까.

 

서귀포 앞바다는 밤이면 하얀 웃음을 웃는다.

이중섭의 게에게 불알 물린

아이들의 웃음 같기도 하고,

불알 까 먹힌 사내들 웃음 같기도 하다.

 

옛 궁궐의 내시들 씨 없는 수박으로

여인들의 마음을 안달나게 만들었었지.

 

이중섭에게 까 먹히고

아기 게에게 따 먹혀서

서귀포에는 불알이 없다.

 

소나 돼지 불알로 만든 안주는

진한 소주가 제격이다.  

 

 

♧ 나이 예순 넘으면

 

나이 예순 넘으면

슬픈 사연 하나쯤은

가슴에 소중히 묻고 살아가다가,

이제는 그 슬픔을 어루만지며,

보석처럼 쓰다듬어 달래고

동무하며 살 줄을 알아야 하리

나이 예순 넘으면

가슴에 담을 것도 그렇게 많아…  

 

 

♧ 세월의 틈새

 

세월 위에다 베틀을 짜는 도안

눈발은 점점 세어진다.

 

가로 새로 촘촘히 엮으며

나를 유년기로 돌려놓고,

노인의 헛기침 속으로

해거름 내 내 눈이 내린다.

 

손 흔들며 떠난

내 첫사랑이 미소로 답하다가,

더 세어진 눈발 속으로 묻혀가고,

 

베틀은 세월을 짜고

세월은 베틀의 틈새로 스며든다.  

 

 

♧ 수묵화 한 점

 

수묵화 속 어떤 나비

꽃향기 따라 날아가지 않고

머물지 못한 곳에 침묵이 한참 흐른다.

왜일까?

비어있다.

먹향만 남고 텅 빈 침묵만 남는다.

침묵 속으로 스며드는 풍경.

수묵이 충만한 단순한 침묵.

영혼의 울림도 비어 있다.

퍼올림으로 메아리 되어

스멀스멀 살아날 것 같은

내 마음에 수묵화 한 점.  

 

 

♧ 숯 이야기

 

죽음이 되어 온 몸으로 비치는 숯은

몸 전체가 불길에 타면서도

눈 부릅뜨고 버티기에 애를 썼을 것이다.

잠시라도 정신을 놓아버리면

세상에 태어난 보람 하나 없이,

잿 가루로 흩날리기는 싫었을 것이다.

노여움 가득 세상을 향하여

소리소리 지르고도 싶었지만,

분노를 속으로 삼키느라

몸통 전체가 새까맣게 탔다.

되도록 쪼개지지도 않게

온 몸 전체로 바치는 숯 이야기.

 

그대는 조국을 위하여

몸 바쳐 무엇을 하여 보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