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모처럼 오름 강좌가 없는 토요일이어서
좀 늦었지만 날을 잡아 가족 묘지에 봄 벌초를 하고
오다가 애월읍 상가리 고내봉 입구 조그만 연못에
하나 가득 피어 있는 이 물양귀비를 찍고 왔다.
부랴부랴 샤워를 끝내고 12시부터 시청 앞 다방에서 열리는
강원호 제3시집 ‘서귀포에는 불알이 없다’ 출판기념회에 갔다.
끝나고 뒤풀이 때, 이 시집을 만든 세림출판사 임태수 사장과
오랜만에 만난 정인수 선생님과 소주 한 잔 했다.
옛날 연극할 때 같이 했던 동료였던 정인수 선생님이
있는 돈을 다 털어 글을 쓰라고 원고지를 사줬기 때문에
시인이 되었다는 애월읍 상가리 출신의 강원호 시인,
마침 그 동네에서 찍어온 물양귀비 사진과 함께
시집 속의 시 몇 편 골라 싣는다.
♧ 詩作 노트를 代身하여
詩人으로 살기 위하여
펌프질을 쉬지 않고 해왔습니다.
하마터면 놓칠 뻔한 詩人의 길.
나에게 위안이 되어준 詩들이 있어
놓치지 않고 선택한 길.
어깨에 가락을 싣고 해학과 풍자도
재미있을 것 같고 달빛 흐린 날
명상과 사색도 멋들어질 것 같습니다.
이제야 말로 詩를 길잡이 삼아,
뚜벅뚜벅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2012년 5월 일
강원호
♧ 나의 序詩
다 헐어 떨어진 옷을 입은 자가 산길을 오르고 있다.
다 헐어 떨어진 옷을 입은 자가 무슨 사연으로
산길을 오르는지는 모르지만
뒤 따르던 산새들 지쳤는지 나뭇가지에 주저앉는다.
다 거덜 난 가슴을 가진 자가 산길을 오르고 있다.
다 거덜 난 가슴을 가진 자가 무슨 사연으로
산길을 오르는지는 모르지만
뒤 따르던 바람 지쳤는지 숨을 헐떡이며 흩어진다.
저 산길 벗어나면 적막강산 혼자일 텐데
뒤 따르던 것들 마음 돌려 모두 돌아서고 나면
저 혼자 외로운 길 위에 나그네로 세상을 등질 텐데
이 귀퉁이에 찢기고 저 모퉁이에 뜯겨
온전한 것 하나 없는 자가 산길을 오르고 있다.
악마 같은 세상 정붙일 곳 없다며 산길을 오르고 있다.
♧ 궁금타!
인간은 왜 모두 주검을
地面보다 낮은 곳에
묻으려 하는가.
어찌 자신의 죽음까지도
낮은 자리에
위치하려 하는가.
그보다 더 내려가면,
거기는 어디일까?
궁금타!
♧ 서귀포에는 불알이 없다
이중섭의 덩치 큰 게들이
집게발을 가진 서귀포의 게들이,
무엇인가 물고 바다 위로 떠오르다가,
다시 바다 속으로 들어간다.
무엇일까.
서귀포 앞바다는 밤이면 하얀 웃음을 웃는다.
이중섭의 게에게 불알 물린
아이들의 웃음 같기도 하고,
불알 까 먹힌 사내들 웃음 같기도 하다.
옛 궁궐의 내시들 씨 없는 수박으로
여인들의 마음을 안달나게 만들었었지.
이중섭에게 까 먹히고
아기 게에게 따 먹혀서
서귀포에는 불알이 없다.
소나 돼지 불알로 만든 안주는
진한 소주가 제격이다.
♧ 나이 예순 넘으면
나이 예순 넘으면
슬픈 사연 하나쯤은
가슴에 소중히 묻고 살아가다가,
이제는 그 슬픔을 어루만지며,
보석처럼 쓰다듬어 달래고
동무하며 살 줄을 알아야 하리
나이 예순 넘으면
가슴에 담을 것도 그렇게 많아…
♧ 세월의 틈새
세월 위에다 베틀을 짜는 도안
눈발은 점점 세어진다.
가로 새로 촘촘히 엮으며
나를 유년기로 돌려놓고,
노인의 헛기침 속으로
해거름 내 내 눈이 내린다.
손 흔들며 떠난
내 첫사랑이 미소로 답하다가,
더 세어진 눈발 속으로 묻혀가고,
베틀은 세월을 짜고
세월은 베틀의 틈새로 스며든다.
♧ 수묵화 한 점
수묵화 속 어떤 나비
꽃향기 따라 날아가지 않고
머물지 못한 곳에 침묵이 한참 흐른다.
왜일까?
비어있다.
먹향만 남고 텅 빈 침묵만 남는다.
침묵 속으로 스며드는 풍경.
수묵이 충만한 단순한 침묵.
영혼의 울림도 비어 있다.
퍼올림으로 메아리 되어
스멀스멀 살아날 것 같은
내 마음에 수묵화 한 점.
♧ 숯 이야기
죽음이 되어 온 몸으로 비치는 숯은
몸 전체가 불길에 타면서도
눈 부릅뜨고 버티기에 애를 썼을 것이다.
잠시라도 정신을 놓아버리면
세상에 태어난 보람 하나 없이,
잿 가루로 흩날리기는 싫었을 것이다.
노여움 가득 세상을 향하여
소리소리 지르고도 싶었지만,
분노를 속으로 삼키느라
몸통 전체가 새까맣게 탔다.
되도록 쪼개지지도 않게
온 몸 전체로 바치는 숯 이야기.
그대는 조국을 위하여
몸 바쳐 무엇을 하여 보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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