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죽도 꽃이 핀지 한참 지났는데
그 동안 가뭄으로 정상적으로 피지 못한 줄 알고
미뤄둔 게 오늘이다. 사실 지금까지 살면서도 고치지
못하는 버릇은 지레 짐작하고 행동하는 버릇이다.
그 사이 많이 피고 져서 마른 꽃이 많아
할 수 없이 부분이나 멀리서 찍은 것을 올린다.
협죽도(夾竹桃)는 협죽도과의 상록 관목으로
유도화(柳桃花)라고도 하는데, 독성이 있다.
높이는 2m 이상이며, 밑에서 가지가 뭉쳐난다.
잎은 세 개씩 돌려나고 선상 피침형이며 혁질이다.
여름에 연분홍이나 흰빛의 향기로운 꽃이 핀다.
꽃, 잎, 가지는 강심제, 이뇨제 등으로 쓰인다.
인도와 페르시아 원산으로, 동아시아에 분포한다.
♧ 협죽도, 난 그댈 기억한다 - 박얼서
하숙집 마당 한켠에서
고독한 겨울을 나는 수도자 협죽도
난 그댈 기억한다
누구에게나 황금기는 있는 법
잘 나가던 여름 날
분홍빛 세월에 빠져있던 시절
그댈 처음 만난 이후
쌓기 시작한 공든 탑이
환호성 치는
순간이 있었다
계절의 신작로를 이어 달려
식객들 두리번두리번 바뀌는 동안
보드기 품 속 같은 수려함에서
아름다움을 경계시키는 신념까지
아무도 그댈 몰랐었구나
그래도 넌 그날을
소중히 간직해 두었느냐
그해 신년 초
신춘문예의 불꽃
푸르른 월계관 번쩍 든 기억들
꼬옥 끌어안은 채
벼랑 끝 혹한을 말없이 견뎌내는
난 그댈 똑똑히 기억한다.
♧ 협죽도에게 동의하다 - 김종제
세상으로부터
당신 마음으로부터
한 발 비켜선 곳에
독(纛) 같은 꽃이 살고 있다
아니 여름의
뜨거운 독(獨)으로 키운 꽃이 있다
한 시절 나도
방황의 독으로 가득했으니
나, 어부사시사(漁夫四時辭)에 동의한다
나, 그토록 유배당하기 원했던
보길도에 동의한다
부용동 세연지에 동의한다
오우가(五友歌) 대신 핀
협죽도라는
유도화라는 꽃에 동의한다
입술에 닿으면
은둔 같은 잠을 유도한다고
유폐 같은 죽음을 유도한다고
한몸에
버드나무잎 복숭아꽃 따로 들어선다니
저 화(火)의 갈증(渴症)의 세월을
어떻게 견뎌왔을까
불타버린 마음에서
풀도 나무도 아닌 것이
제일 먼저 부흥으로 피어난다는
당신과 마주친다
바다 건너 온 것들 모두
당신에게 첫발을 딛는다고 했던가
보길도에서
나, 윤선도 협죽도 당신에게 동의한다
♧ 박용래 - 나태주
술
술은 마음의 울타리
술 속에 작은 길이 있어
그 길을 따라 가 보면
조약돌이 드러난 개울
개울 건너 골담초 수풀
골담초 수풀 속에 푸슥푸슥
날으는 동박새
스치는 까까머리 아기 스님 먹물 옷깃
누가 마음의 울타리를 흔드는가
누가 마음의 설렁줄을 당기는가.
江景
안개비 뿌옇게 흐려진 창가에 붙어서서
종일 두고 손가락 끝으로 쓰는 이름
진한 잉크빛 번진 서양 제비꽃, 팬지
입술이 갈라진, 가슴이 너울대는.
오류동
방안에 들였어도 퍼렇게 얼어죽은 삼동의 협죽도
쇠죽가마 왕겨불로 달군 방바닥은 등을 지져도
외풍이 세어서 휘는 촛불꼬리
들리지도 않는 부뚜막의 겨울 귀뚜라미 소리
찔찔찔찔 들린다 해서 잠들지 못하는
초로의 시인
웃목에 얼어죽은 제주도 협죽도가
함께 불면증을 앓고 있었다
대전시 교외 오류동
삼동의 삼경, 귀를 세우고
♧ 라벤더 - 노혜경
죽음이 갑자기 내 곁에 누워서, 오래 묵은 술처럼 향기롭게
내 뼈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오래 묵히면, 그대도 향기롭겠다고
나도?
오, 나도!
나는 갑자기 무덤이 된다
내 위로 아직 없는 나무들이 보인다
생겨나지 않은 줄기들이 먼 별을 향하여 가지를 벋고
그 가지 끝에서 연록색 이파리들이 하늘거리는 걸 나는 본다
향기들이 퍼져 간다
협죽도? 오, 아니, 라벤더? 그 무엇 같기도 한 같지 않기도 한
향기가 자라난다
라벤더.
♧ 그리운 사람 - 고혜경
칡 잎 사이로
보고픈
한 사람
웃음을 감으며
날 내려 다 본다
따라 나선 길목마다
덩굴손이 돌돌 감아
잔털로
그리움을 찢는다
협죽도 꽃잎
아랫입술 터트려
선홍빛
수의(壽衣)입고
당신에게
갈 수 있는
사랑이라면
소나기 퍼붓다
진실 없이 죽어 간
코스모스인들
가슴에 못 품을까
♧ 유도화는 너무 붉다 - 윤지영
열풍이 불어온다.
적도로부터, 혹은 지구의 핵으로부터
-하이얀 거리, 하이얀 지붕, 하이얀 창문, 하이얀 차도, 하이얀 신호등, 하이얀 쇼윈도로
하이얀 열풍이 불어온다. 열풍은
살아있는 모든 것을 추방한다.
아가도 개도 자동차도 꽃가게도 대합실 부근의 리어커도 건너 편 양장점 쇼윈도 안의 마네킹도 졸고 있는 사거리의 교통 경찰관도 모두 쫓겨간다.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줄지어선 유도화만 천 개 만 개의 태양을 쏘아 올리며 깔깔거리고 있다. 8월의 거리에 살아 있는 것은 오직 유도화 뿐, 붉게 일렁이는 유도화 뿐이다.
열풍이 불어온다.
-하이얀 거리, 하이얀 지붕, 하이얀 창문, 하이얀 차도, 하이얀 신호등, 하이얀 쇼윈도
모두 꽃잎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지, 붐비는 꽃잎의 입구에서 호르라기가 교통 정리를 하고 있다.
♧ 제주에 부는 바람 - 정군수
태풍의 눈이 제주 앞 바다에 이르렀을 때
나는 일주일을 여관에 갇혀서
텔레비전 속에서
산산이 찢겨진 내 몸뚱이가 바닷새가 되어
공중으로 치솟는 것을 보았다
몸뚱이에서 몸뚱이가 떠나가는 일탈감
찢겨나가는 해방감에 젖어
나의 눈은 태풍의 눈을 집어삼키고
한없이 공중을 날고 있었다
성난 포말을 안고
갯절벽에 무참히 껍질을 박살내고 있었다
창밖에서는 유도화가 머리를 풀고
떠나지 못하는 원혼처럼
죽어라하고 몸을 흔들고 있는데
섬나라 작은 방에 나를 가두고
이렇게 자유로울 수 있으랴
떠나고 싶어서 더 멀리 떠나온 나
제주의 바람이 나를 안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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