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엔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라
희미해지는 발자취
마지막 매미가 울고 있다
이 맑은 황금빛 햇살의 들길을 따라
은 사시나무 우거진 강변에 나아가
가을 빛을 유영하는 잠자리를 만나면
밤새 잠 못 이루어 가슴까지 게워내던
내 영혼의 잃어버린 가을을 펼쳐보이리라
지상에 제일 높다는 추전역 굽이굽이
사람들 기억에 잊힌 저 깊은 오지
골짜기마다 마른 풀들이 바람에 바람에
숨어 우는 고립의 그늘
쓸쓸한 가을의 명부들이 펄럭이는 곡조를 타면
삐걱대는 역전의 쇄골에 폐쇄된 삶의 숨결은
당신의 우울보다 한층 무겁고
초라하게 버려진 탄광 지 들꽃들도
마지막 정사에 서러운 태백 가을이 보고 싶어라
이미 늙어버린 그리움이 바람과 떼지어
다시 그리움을 소환하는 가을 위로
왜소한 당신의 사랑만큼 휩쓸고 간
시간의 행방 위에 온몸을 내던지는 낙엽
가을로 부서지는 9월 향기들이 지천을 떠돌 때
단적인 삶의 아픔에 무력한 우리 사랑이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망각으로 사무쳐도
다시 호박색으로 번지는 이 가을엔
황홀한 전설의 숨결 속으로
자꾸만 떠나고 싶어라
♧ 살아있다는 것은
삶이
절대적 고독이어도
살아 있으므로
견디는 것은
빛줄기를
친친 엮어서
흐르는 물소리
스치는 바람소리
지저귀는 새소리
가슴에
일체를 어우르는 빛
맑은 하늘 한점
들여 놓기 위해서다
♧ 가을에는
우리들 생각의 창에 머무는
아름다운 가을은 허무요 아픔입니다
가을엔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상심한 우리 가슴으로
새로운 길이 하나 생겨납니다.
풍요의 결실과
넉넉한 추수의 부유함에도
가을 깊은 강을 건너는
우리들 마음에 바람 부는
비어있는 조그만 귀퉁이
떠날 곳이 없음에도 떠나고 싶은
그 어느 귀향의 종착지가
죽도록 그리운 날
정점 같은 어두움에
서글픔으로 물오르는
삼등 칸 야간열차를 타고
정처 없이 떠돌다가
그리움 한 자락 이방인처럼
낯선 도시에 미련없이 훌쩍 버리고
눈물 젖은 삶의 손수건도 묻어 버리고
어두움의 깊은 혼에
따뜻한 불 밝히고 싶은 간절함이
가을엔 누구에게나
소망처럼 끊임없이 피고 집니다
♧ 비 오는 날의 추억
도대체 언제까지 내릴 심산인가
반추할 추억마저도
지우개로 문질러
지울 수 있다면 좋을 시간
베어진 가슴이 아플 때
떨리는 영혼은 슬피 운다
아름다운 순간을 떠올리며
아무리 살아도
인생은 환상 같이 머물러 주지 않는
나의 목멘 시간 위에
굽은 등으로 흘러만가고
비 오는 유년이 아련하고
가난하여 초라 하나
아름답게 만개한 5월의 동산에서
대지에 낀 때를 시원스레 씻어 내던
유년에 내리던 비, 그 비가
오늘도 저렇게 끊임없이 내린다
♧ 잊혀진 계절의 고독과 비
잊혀 진 계절에서
시간은 언제부터인가
오만한 청춘을 말살하고
적당히 후회로 일관된 변명에
여지없는 고독의 그림자를
달랑 던져 주었다
잠결에 섬 짓 하게
가슴에 노니는 빗소리
손끝에 와 닿는 물컹한 감촉
달아나 버린 잠에
무엇일까 팔을 뻗으니
형체 없이 내 품을 파고드는
시린 고독의 무게......
열리지도 않는 맘에
슬그머니 도둑처럼 들어앉아
고독은 저 혼자 빈 공간 가득
너울너울 춤을 춘다
빗소리에 춤을 춘다
가늠할 수 없는 계절과
정사를 꿈꾼 건 아니었다
단지 지금은 고요를 원하고
깊은 수면을 원한다
쪽빛으로 환하던 하늘에
누군가 대못을 들고 와
쾅쾅 말뚝을 박은 뒤론
비가 오면 비가 샌다
말뚝을 박은 자리엔
어김없이 비가 샌다
♧ 가을 소나타
삼복에는 마른 바람에 더위만 잔뜩 걸린 채
바람은 제 스스로 자해하고 있었는지 별말이 없었다
박피 되는 여름은 상처를 무릅쓰고도
다홍 빛 꿈들이 알알이 영글어 가는 가을을 출산했고
이제 바람은 싸늘한 입김으로 온 거리와
들판을 가로지르며 가을이라 소리친다
어느 골목 음지에 잡풀의 삶은 평행을 이탈했다
삶은 그렇듯 바람의 결 따라
점점 고개 숙이며 생의 불을 하나씩 끄는 일
상처는 생존을 헤집고 균등한 배정도 없이
술처럼 취해 온몸의 혈관을 타고 흐른다
하나의 잎이 지면 또 하나의 잎이 지고...
연속으로 흐르는 시간에 생존을 몸부림치는 낙엽
어쩌면 좋으냐
균열 되는 냉엄한 현실에 절제를 배우는 일은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 만 하는 것들의 슬픔을
사랑을 사칭하면 꼼작 없이 흔들리는 시어들의 휘청임
눈물은 아무리 따져도 창의성이 없다
그래서 늘 도태된 삶을 탄식하는 일이지
저녁이 가고 아침이 오면
밤새 추락한 별똥을 줏으며 울어야 하는
가을에도 기다람엔 수신인이 없다
비단 떠나는 것이 낙엽뿐이겠는가
이 가을엔 무거운 삶을 내려놓는 모든 것들이
정처없이 떠남을 꿈꾸나니
원망도 없이 서글픈 떠남을 꿈꾸나니
우리가 누렸던 모든 사랑도 세월에 따라 피고 지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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