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토요일은 오름 길라잡이 수강생들과 함께
예촌망에 갔다. 쇠소깍에서부터 예촌망까지
공들여 조성해 놓은 예쁜 산책길은 세 번의 태풍이
온통 뒤집어 버렸고, 그곳 길섶에서 자연스럽게
자라던 들꽃들도 모두 태풍과 파도에 사라져버렸다.
어지러진 가시밭길을 돌아 능선 길에 올랐을 때
태풍의 상처를 치유하듯 빛나는 이고들빼기 꽃무더기가
주는 밝은 모습으로 인해 공허한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지난 주 목요일 강화군 석모도의 보문사가 있는
낙가산에 오르면서 보았던, 감국과 이고들빼기의
해맑은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이고들빼기는 국화과에 속한 한해살이풀 또는 두해살이풀로
높이 30~70cm 정도로 자라고, 뿌리에서 나온 잎은 주걱 모양이며
줄기의 잎은 어긋나고 톱니가 있다. 8~9월에 황색의 꽃이 피며,
열매에는 열두 개의 선이 있는데, 어린잎은 먹는다.
우리나라, 중국, 일본, 인도차이나 등지에 분포한다.
♧ 고들빼기 - 구재기
쓰디쓴 고들빼기가
아직도 산과 들에 절로 남아
자라고 있었던가
아내는 *구드러진 비닐주머니를 챙기다가
플라스틱 장바구니를 부추기며
연신 고들빼기를 꺼내어 다듬었다
쓴맛이 살아 있어 입맛을 돋군다지만
고단한 장바구니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었던 아내는
땅의 높고 메마름이 힘에 겹다면서
고들빼기의 곧은 줄기에도
가지가 많이 돋아있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고 했다
---
*구드러지다 : 식거나 말라서 뻣뻣하게 굳어지다.
♧ 고들빼기 - 소양 김길자
인생의 맛이 이럴까
뜨물 같은 쓴맛 우려내듯
설움이란 게
일어서는 줄기마다
어머니 품에서
빠져나오는 진한눈물
꽁꽁 얼은 밭둑
땅속 돌 틈이라도
헤집고 찾고픈
어머니의 세상맛
♧ 고들빼기 - 우공 이문조
오늘
저녁 식탁에
고들빼기김치가 올랐다
인생의 쓴맛처럼
쓴맛 나는 고들빼기김치를 좋아한다
입에 쓴 것은 몸에 좋다지 않는가
나는
입에 쓴 음식은 곧잘 먹으면서
귀에 쓴 말은 잘 참지 못한다
귀에 거슬리는 말도
내 마음에 보약이 되는데 말이다.
♧ 씀바귀와 고들빼기 - 김내식
무려 40년간 좋으나 싫으나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다
집에서 논지 불과 한 달이라 글이나 쓰며
빈둥빈둥 지내자니
아내는 소금절인 고들빼기요
나는 씀바귀라
이래서야 어디 병들지 않겠는가,
아내의 낮잠 깨워
배낭 메고 산촌의 마을로 갔지
하필이면 그 것들은
메마른 밭둑
척박한 산비탈에 뿌리내려
모질게 살아가니
캐기가 좀 미안했지
아무튼 갖고 와
소금에 절여 며칠 우려내어도
왜 그리 쓴지
허무한 40년 지방 살이,
서울땅값이 오른 만큼
쓰디쓰다
알뜰한 적금으로 사는 이는
무능한 백성이 되고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치부하여 나라를 통치하는 자들이
정답 되는 세상처럼
억수로 떫고 쓰나
입맛이 산다
♧ 향수에 젖은 시 무침 - 권오범
도시 태생 시인들 입맛에 맞지 않아 방황하는
촌스런 언어 짬짬이 잡아
정서 곳간에 갈무리해놓고
성숙해지길 기다리며 건넌 겨울강
오만 풋내나는 것들이
짬짜미 봄과 내통해
잠 털고 일어나 좀스럽게 서성대자
시 겉절이라도 돼 나들이 하고 싶어 안달 난 속
내 마음의 창으로 쏟아져 들어간
너울가지 좋은 햇살에 목욕했겠거니
번거롭게 씻지 않은 채
목가적 기억 되작여 뿌리째 조몰락거려보는 자판기
그 어떤 비유로도 대신할 수 없는 쑥국에
쌉싸래하게 풍기는 고향 은유
지칭개 소루쟁이 고들빼기 쓴나물 맛 눈치채고
영리한 혀가 참지 못해 자꾸 고문하는 침샘
♧ 고들빼기 - 이운용
전주 땅을 밟으면
여염집 밥상에 올라오는 고들빼기
조금은 씁쓸하지만 입맛 돋구는
이 쓴나물을 어디서 캐시나요?
논두렁 밭두렁 백 번은 넘나들며
아랫집 머슴 ‘창섭’이가
누구네 꽁무니 뒤따라 오르내리던
언덕배기 같은 데
삶아도 삶아도 살아서 무너지는 꽁보리밥
이 없어도 꿀꺽 잘 삼킨 할머니가
헉헉 숨이 차서 올라가시던
산비탈 묵정밭 같은 데
주워 먹으면 쫄깃쫄깃 맛있다는
별똥 떨어진 재 너머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쑥대밭머리 돌밭 같은 데서
오늘은
‘창섭’이의 딸 같은 처녀애와
할머니의 손녀 같은 아주머니가
허부적허부적 기어올라 캐 오는 고들빼기
생김새치고는 못난이 헌 두더기 같이
버러지한테 뜯긴 잎사귀
짐승한테 밟힌 잎줄기
사람한테 들킨 실뿌리
온갖 눈치를 땅바닥에 깔고 살다
제 모습 아니게 고스러졌지만
캐보면 다르니라,
겉보기와는 다르니라.
밑이 잘 들어 허연 살뿌리
이놈이 진짜이니라,
진짜 맛있는 건 잎사귀 아니라,
진짜 맛있는 건 뿌리이니라,
오천 년 밤낮으로
우리고 우리어도 남아 있는 씁쓸한 맛.
젓국에 갖은 양념에 막 버무려 놓아도
그래도 아직 남은 씁쓸한 쓴나물 맛,
이것이 너이니라.
네가 버리지 못하는 진국이니라.
한번 맛들이면 환장해서 찾는
진짜 우리나라 맛 전주 맛이니라.
고생고생 애성이 받치던 세월
오늘은 놀랍게도
이렇게 틀슬한 눈물로 자랐구나!
요즘은 너나 없이 인공 재배하여
뿌리는 가늘어져 실낱이 되었고
잎사귀만 웃자라 무웃잎 같더라니
전라도산 고들빼기 어디로 갔느냐?
무성한 잎사귀
한겨울 못배겨 주저앉기 일쑤이고
주린 짐승 뜯어먹기 십상이니
속으로 땅 속으로 머리 돌리고
언덕배기면 묵정밭에
돌밭이면 돌밭 같은 데서
쓰라린 흰 눈물 먹고 자랐다기로
누가 이 고들빼기를 개땅쇠라 하더냐!
누가 이 고들빼기를 철조망이라 하더냐!
누가 이 고들빼기를 하와이라 하더냐!
누가 이 고들빼기를 니꾸사꾸라 하더냐!
그도 저도 다 아닌 것,
고들빼기는 고들빼기
문둥이면 어떻고 깍쟁이면 어떻고
감자바위면 또 어떠냐?
고들빼기는 고들빼기니라.
영락없이 맞아서 피먹진 먹자줏빛 잎사귀
허연 뿌리 씁쓸한 맛, 이것이
진짜 우리나라 전라도산 고들빼기니라.
♧ 수다스러운 시 - 이민정
잘 말려진 코다리 졸임 한 조각, 곰삭은 고들빼기 한 접시, 포르르 끓인 계란찜,
이제는 노래보다 더 정겨운 어머니 잔소리, 힘없는 솜방망이 핀잔,
속 끓이다 새어 나오는 웃음이 한 상에 같이 누웠어.
나도 같이 웃었지.
남은 날이 얼마나 된다고 아옹다옹이야,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살아지면 그뿐
어머니 주름살이 더 깊어지지 않게 마자시도 받게 해드리고
내 주머니 꽉꽉 채우자고 남의 눈에 눈물, 한숨, 설움, 그딴 거 지우지 말고
하루 벌어 하루 살아도 이만큼만 웃으면 좋겠다, 그러면서 웃었어.
머리카락이 염색약 달라고 하면 난 그럴 거야, 우리 풀이랑 흙이랑 살자.
살랑살랑 부는 바람 빝에 집 짓고 너랑 나랑 우리 둘이 물가에 살자.
어머니 손끝에 익어지는 장맛처럼 들쭉날쭉, 가끔은 변덕스럽게 싸워가며 살자.
어떤 때는 매콤한 눈물도 나게, 어떤 때는 아릿한 노염도 품고 삭이면서
대부분은 구수한 웃음으로 풀이랑 흙이랑 같이 물가에 살자.
아, 그러려면 남 앞에 구부리지 않아도 좋은, 허리를 받쳐줄, 돈이, 있어야지.
그렇구나, 돈은 좀 필요하겠다 싶어 또 생각해. 오늘 열심히 일하면 되지, 하고
오늘 열심히 일해서 번 돈으로 풀이랑 흙이랑 같이 물가에 살아야지 하고.
꼭, 너랑 같이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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