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 갔던 에코랜드
오랜만에 장난감 같은 기차도 타보고
여름날 같으면 한껏 푸르렀을 곶자왈 숲과
시원한 인공호수를 느꼈을 테지만
눈도 없는 곳에 겨울 햇살을 받아
더욱 푸르러 보이는 이끼만
혼자 푸르러지고 있었다.
이미 눈 속에 있다가
풀려난 것이다.
다시 눈이 쌓여도
푸르름을 잃지 않을 녀석들.
♧ 이끼 - 김순남
꽃그늘이 아니어도 좋다.
바람이 지날 때
사랑의 말 한마디
전할 수만 있다면
흙이 아니어도
썩어진 나무 등걸
단단한 바위라도 좋다.
총총 박혀드는 햇살
한나절 가슴 태워
그리움으로 짙푸른 심장
마주 바라보며
사랑의 말 한마디
주고 받을 수만 있다면
꽃그늘이 아니어도
꽃그늘이 아니어도 좋다.
♧ 이끼 - 임혜신
상냥한 그대, 그대가 비록
맑고 쾌활한 호수 같이 눈부시고 청정하나,
그러나, 그러하나, 왠지,
그대 또한 어느 모호한 안개의 거리
은밀한 가해자일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으로 혹시
밤잠을 설치고 있다면, 그렇다면 지금 다가와 봐
낮은 곳에 서식하는 내게
눈물의 발아래 기생하는 푸른 식물에게
선택되었던 자와 버림받았던 자
행복했던 자와 불행했던 자, 그렇게
믿었던 자와 의심했던 자들의
살과 뼈에 자라나는 촉촉한 깃털들에게
어둠 속에서 더 잘 번식하는 용서의 입술에게
한 마리 승냥이가
깔고 안기 좋을 만큼
밟고 걸어다니기 더 좋을 만큼 고요한 양탄자
속죄하는 짐승의 어깨
길게 갈라진 슬픔의 상처를
끌어안고 타오르는 오, 나지막한 불의 가슴에게
내가 알려주지
그대가 근심한 시간과
공간의 저 신비한 희생자들이 모두,
어디서
얼마나 평안히 쉬고 있는 지를,
♧ 산이끼 - 양수창
山에서 돌아오는 길에
산을 덮고 있는
산 이끼를 뜯어다가
화분에다 얹어주었더니
서로 어울리지 못하고
어색하게 겉돈다.
다독거려 주고
타이르고, 그냥
모르는 체 했다.
어느 날 아침,
화분을 모아놓고 물을 주는데,
이끼를 얹은 화분이
山 소리를 한다.
산에서 듣던 소리를
화분에게 듣는다.
그 작은 몸짓으로
山처럼 행동하는
화분을 바라보면서,
어쩐지 어설픈
나를 생각하며 웃는다.
♧ 청동(靑銅)의 거울 - 기청
언어 하나로 나를 세울 수 있을까
언어 하나로 세상을 세울 수 있을까
칼끝에 바르르 떠는 푸른 바람
대숲으로 세울 수 있을까?
언어 하나로 나를 채울 수 있을까
언어 하나로 세상을 채울 수 있을까
풀잎에 구르는 이슬방울 하나로
세상을 채울 수 있을까?
언어 하나로 나를 비울 수 있을까
언어 하나로 세상을 비울 수 있을까
한줌 티끌도 녹이는 명징(明澄)한 모국어로
세상 가득 출렁이며 꼬이고 넘쳐나는 것들
향기로운 싸리비로 쓸어내면
비로소 떠오르는 그날 청동(靑銅)의 거울
눈 감아도 얼비치는 빛살을 헤집고
천년 이끼긴 시간을 단숨에 건너뛰어 그렇게
오롯이 열리는 청잣빛 하늘
그렇게 비워낼 수 있을까?
♧ 연가(戀歌) - 소양 김길자
깊고 외진 곳에서
뿌리 내리며 움 트지만
돌아갈 집이
없어서가 아니다
어둠에서 빛을 만나
몸부림치듯 떠나기 원해도
가슴 쓸어내리며
허공을 향해
울부짖는 너의 노래인 것은
아물지 못한 상처
비목(碑木)의 이끼 되어
한숨 끄집어내는 그리움
한잔의 향기로 채우며
저무는 황혼
물안개로 피우고 싶다.
♧ 탑 - 한금산
오늘도
스친 인연을 그리워하고 있다.
지워져 가는 사랑을
새겨두었던
그 많은 이야기는 이끼로 남고
하늘과 맞닿았던 소망은
아직도 저 탑의 끝에서
하늘을 향하여 소리치고 있는데
하늘은 말이 없고
강물만 소리 없이 흐르고 있다.
염원의 뿌리는
탑신에 묻어두고
안개는
강물만 남겨둔 채
저 혼자 산을 넘어간다.
사랑의 체온이
아직도
저 탑 속에 온기로 남아 있을까?
인연마다 돌이 되어
천년을 못 잊는 가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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