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동안 추운 날씨가 계속되고
오랜만에 오름에 가보니
억새가 겨울을 맞아 씨앗을 말리며
이제 막 날려 보내려 한다.
억새가 보기 좋을 때는
처음 이삭이 패어
작은 꽃을 내밀고
금빛이나 자줏빛을 띨 때와
지금처럼 색은 좀 바랬지만
머리가 허옇게 세어
씨앗을 훌훌 털어버릴 때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이것도 억새꽃이라 하고
저것도 억새꽃이라 한다.
그래도 되나?
♧ 억새 - 권도중
지나올수록 할 말이 많고
살아갈수록 부대낌이 많은
이 언덕 오르기엔 숨차지만
저 언덕보다는 절실한 곳
가득한 가을로 오라
억새처럼 흔들리며
♧ 반짝이는 억새를 보며 - 제산 김 대식
꽃이라 부르기엔
너무 하얗게 쉬어버린 백발
하얀 백발조차 그토록 윤이 나게 아름다운 건
억세도록 힘차게 살아온 생
아마도 그 억센 생명력 투지 때문이었을까?
불어오는 폭풍에도 굳건히 견뎌온 억센 끈질김
그 속에
이렇게 눈부시게 아름다운
순백의 부드러움이 있었을 줄
♧ 억새 사이로 - 이선명
바람처럼 슬프게 웃는다
흔들리는 지난날의 열정
언제나 자유롭고 싶었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선명한 흔적이고 싶었다
바람은 한 길로
억새는 수십 갈래로 흔들린다
꿈은 현실이지 못해 더 애틋한가
삶을 기억하고 기다림을 배운다
바람처럼 슬프게 웃는다
♧ 억새의 풍경 - 박종영
엊그제 까지 붉게 달아오르던
늦가을,
억새는 가슴 깊은 곳에서
바삭대며 살아 오르고,
흩날리는 꽃이삭의 통증을
염려하는 산 바위는 먹먹한 가슴으로
하냥 속울음만 감춘다
곤욕스레 흔들리는 아픔의 눈물은
겨울로 가는 길목,
잎진 청단풍이 발갛게 옷을 벗어 던지는 설움,
검은 구름 앞세워 후드득 빗소리
툭툭 걸어간 자리 정갈스럽고
명복을 비는 듯, 고요하게 속 비우는 산은
머리 푸는 억새의 풍경을 주워 모으고.
♧ 억새 - 청하 권대욱
익숙하지 않은 길
홀로 창공을 헤맨다
섣달 초사흗날부터
놋쇠소리 내는
날 선 바람에도 굴복 않았던 육신이
삭막한 벌판에서
풀어헤친 오지랖은
낯선 계절의 여백을 버티고 있다
말없이 만들어준 메마른 세상 속
수줍은 온기라도 더하면
창백한 숨소리 고르는 나는
유연한 생존을 체험하고 있다
광야의 길 복판에 선
너처럼.
♧ 억새 - 하태수
우리가 산다는 건
태어난 빚 갚기 위한 걸까
하늘에
마음을 메달아, 놓고
실컷 울려고 했다
세월을 불러놓고 보니
내 머릿결은
허연 백발로 나부끼고
침전된 뭇 아픔들이
할퀴고 간 주름살에
서녘이 찾아들 때쯤
스치는 바람마저
보이지 않는 길 부딪혀
가슴 저리도록 서러운가
서늘한 허공
끌어안고 말라버린 눈물샘
기억마저 거두어간다
♧ 겨울 억새 - 유소례
제 철 넘어
무덤 터 지나도록
대궁 속으로 숨 쉬는 억새는
산기슭 낮은 자리에서
재넘이 바람매에 벼린 칼날이다
억센 척추 세워
햇볕 가루 구름 비늘에 비며 삼키며
가슴 안에
마르지 않는 꿈
헤아리며 살아 간다
때론 휘휘한 목 안에
모래가 버석버석 할지라도
큰 숨 뿜어 허공에 날리고
밤안개에 젖은 살갗
툭툭 털어 바람에 실어 보낸다
해가 진 계절의 억새
살과 살이 서걱대는 울음은
속심지에 고인 삶의 울분을 지워내는
방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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