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이 지나고 영춘화를 찍고 온 날 우리詩 2월호가 도착했다. 강동수 시인의 ‘시가 있는 풍경’으로 시작되어, ‘우리詩 칼럼’은 김금용의 ‘한국시는 희망적인가’, ‘신작시 29인선’은 정일남 차영호 정숙 주정림 송문헌 박정래 백영희 한소운 임솔내 김정 박설희 민문자 최윤경 전건호 조경진 정혜영 김진수 허연숙 박동남 해림 유영옥 김금희 남대희 이해수 정영희 조재형 라태임 이진욱 장선희의 시 각각 2편씩을 실었다.
기획특집 신인시각(3)은 ‘시로 쓰는 자본론’으로 조삼현의 ‘다가구 주택’외 4편, 서평은 ‘그 모든 질곡을 통과한 인간은 어떤 맛일까?’로 홍해리 시집 ‘독종’을 홍예영이 다루었고, ‘인식과 상상의 무한 증식’으로 김진돈 시집 ‘그 섬을 만나다’를 이덕주가, ‘내가 읽은 시 한편’은 정호승, 홍영철, 이장욱, 오명선의 문제작들’을 살펴보았다.
‘신작 집중조명’으로는 이무원의 ‘첫눈’외 5편과 나호열의 ‘껌’외 5편, 해설은 김선주가 맡았다. 우리詩 시론은 황정산의 ‘현대시와 권태’, 시안으로 읽는 우리 문화는 박상미의 ‘영화와 역사 사이(2)’, 우리詩 에세이는 한옥순의 ‘삐라꽃 떨어지던 동두천’이 실렸다. 시를 읽으면서 몇 편 골라 어제 한림공원에서 찍은 영춘화(迎春花)와 같이 올린다.
♧ 마술사 - 정일남
그는 허공에 손을 넣어 장미꽃을 꺼낸다
뭉친 보자기에서 비둘기를 꺼내 날려 보낸다
태운 종이에서 만 원권 지폐가 나온다
평범해서는 관심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다
긴장이 진행되는 동안
그의 이마는 멀쑥하고
건조한 바람이 쓸고 간 마당 같다
숙당된 손의 움직임은 사실을 은폐하고 기적을 창출하는데
정신을 집중해 보아도 속이는 이면을 발견할 수 없다
혼을 흐리게 하는 술법이 초월의 광채를 드러낸다
관객을 속이고도 그는 공로상을 받았다
나를 바보로 만드는 속임수에 분노 대신 찬사를 보내다니
그의 비법이 불가능을 가능케 했으므로
거짓이 진실로 환원해버렸다
허명으로 그의 무대는 풍년이 들었다
관중을 속이고도 갈채를 받아먹고 사는 허무주의자
나는 언제 허공에서 꽃 한 송이 꺼내나
♧ 알리바이 - 차영호
모기 뱃구레가 통통하다
임산부라도 되는 양
어기적어기적
나도 모르게 낚아챈 손바닥에
흥건한
피
나는
AB형
이 방에
우리 단둘이
머물렀으니
지금 사망한 문(蚊)양의 혈액형을
도말법으로 변별하면
너는?
♧ 나는 너를 너무 믿었다 - 주경림
마스터키라고
잠긴 것은 모두 다 열 수 있다고
그럼 나를 열어 봐
바쁘게 사느라,
나를 열 수 있는 열쇠를 까맣게 잊고 말았다
마스터키를 내 몸의 구멍마다 넣고 돌려본다
그런데 쉽지 않았다
헐렁헐렁해서 힘을 못 쓰기도 하고
숫제 들이밀 수도 없이 좁아진 곳도 있었다
너는 여전한데 내 몸이 변한 것이다
그러다가 딱 맞물리는 순간
마스터키 허리쯤이 부러지고 말았다
빼도 박도 못하게
마스터키, 너는 내 몸이 일부가 되었다
통째로 나를 깨뜨리지 않고는
너를 꺼낼 수가 없게 되었으니.
♧ 사명암 - 백영희
도반에 등 떠밀려 사명암에 오른다
동원스님의 대금소리 듣고 자란
금빛 잉어들 범문의 집을 짓는다
피어오르는 단청의 꽃향기에
여자와 물고기는 한 몸이 된다
일상의 그림자 법당에 벗으니
차 한 잔의 주인공이 되어
여여함이 왈칵 눈물로
마음의 발길을 붙잡는다
지혜와 허무가 나란히 서서
빈집을 게워내며
태어남과 사라짐이 하루에 펼친
부처가 되는 하루
마음의 쇠 소리 풍경이 몰고 간다
♧ 식용 돋보기 1 - 김진수
- 원료 및 함량
관심 밖, 내 시력은 1.5 1.5
물건 살 때마다 가격만 물었지
혀끝을 감도는 그 맛은 무엇이며
오줌발이 금세 노랗던 그 이유를
알지도 알려고도 해보지 않다가
좁쌀보다 더 작고 빼곡한 글자 속에
도무지 알 수 없는 희한한 용어들을
오늘아침 문득 눈비비고 보았네
돋보기 들이대고야 겨우겨우 읽었네
♧ 성장통 - 라태임
애써 차려놓은
따뜻한 밥이 식고 있다
생선살을 발라주고
자식의 입에 먼저 밥을 떠먹이느라
김빠진 식사를 대충하는
수척해진 딸
닭 모가지와 생선 대가리,
찬밥을 제일 좋아하신다던
어머니가 그리워
올려다본 하늘
구름이 제 몸을 찢어내고 있다
찢어진 것이 또 제 몸을 찟고 있다
어디선가
제 살 떼어내는
소리 없는 비명이 들려온다
♧ 다가구주택 - 조삼현
32세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의 단칸방
창문에 수신자 불명의 격서 붙어있다
그동안 너무 많은 도움 주셔서 감사합니다
창피하지만 며칠째 아무것도 먹지 못했는데
남는 밥이랑 김치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드려주세요
한 끼 굶어 담 넘는 길고양이와
사흘 굶어 담 넘는 도둑과
굶어 죽어도 담 못 넘는 그녀의 선택 사이엔
몇 공기 밥알의 갈등이 있었을까?
지랄지랄지랄 눈은 흩날리고 이 도시 늪지 저편엔
공룡자본주의의 성기처럼 우뚝 선 백화점
샹들리에 불빛은 질겅질겅
껌 씹는 나부(裸婦)처럼 깜박이는데
화냥기를 질질 흘리며 호객행위를 하는데
세모가 바뀌면 둥근 해 뜨려나
세밑이 저물어도 새해가 오지 않는 시간의 허방
(전기요금을 내지 않아 단전합니다)
그녀 방 싸늘한 전기장판은
주인보다 먼저 체온을 놓았다
제국의 뒷골목이여, 자본의 사생아여
매음(賣淫)을 핥느니 요절을 꿈꾸었구나
♧ 내 그림자에게 - 정호승
이제 우리 헤어질 때가 되었다
어둠과 어둠 속을 떠돌던 나를
그래도 절둑거리며 따라와 주어서 고맙다
중략
이제 등에 진 짐은 다 버리고
신발도 지갑마저도 다 던져버리고
가볍게 길을 더나라
그동안 너는 밥값도 내지 않고 내 밥
을 먹었으나
이제 와서 내가 밥값은 받아서 무엇
하겠니
굳이 눈물 흘릴 필요는 없다
뒤돌아서서 손 흔들지 말고
가라
인간이 사는 곳보다
새들이 사는 곳으로 가서
어린 나뭇가지에서 어린 나뭇가지로
날아다니는
한 마리 새의 그림자가 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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