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월문학 제4호가 발간되었다.
제주도 애월읍 출신 작가들의 동인지다.
1개 읍에 이처럼 많은 문인이 있다는 것도 놀랍지만
전 장르에 걸친 작품도 놀라울 뿐이다.
이번 호에는 특집을
전국의 시인들이 애월에 와보고 쓴 시를 모아
‘애월에서 생각한다’로 10편을 묶었다.
아무래도 바다 사진을 넣어야 하겠기에
한담동에서 곽지해변까지
아담한 산책로에서 찍은 사진과
시들을 내보낸다.
♧ 애월 - 정희성
들은 적이 있는가
달이 숨쉬는 소리
애월 밤 바다에 가서
나는 보았네
들숨 날숨 넘실대며
가슴 차오르는 그리움으로
물미는 소리
물써는 소리
오오 그대는 머언 어느 하늘가에서
이렇게 내 마음 출렁이게 하나
♧ 애월 바다 - 이정환
사랑을 아는 바다에 노을이 지고 있다
애월, 하고 부르면 명치끝이 저린 저녁
노을은 하고 싶은 말들 다 풀어놓고 있다
누군가에게 문득 긴 편지를 쓰고 싶다
벼랑과 먼 파도와 수평선이 이끌고 온
그 말을 다 받아 담은 편지를 전하고 싶다
애월은 달빛 가장자리, 사랑을 하는 바다
무장 서럽도록 뼈저린 이가 찾아와서
물결을 매만지는 일만 거듭하게 하고 있다
♧ 애월 바다까지 - 송재학
바다를,
물빛을,
가만히 내버려 둘 것
한눈으로 붙잡지 못하는 부피가 버겁다
아무리 퍼내도 걷잡을 수 없는
코발트 물빛이다
방파제와 정적이 소로 혀 들이미는 오후,
내 꿈을 유채꽃 대궁 위에 올려놓는다
가까이 다가가면 애월 길은 미끈거리는 식도
검은색의 비애에 사로잡힌 건 내 소용돌이다
칼날이 된 바다가 옆구리에 박힌다
천천히 서 있는 전신주들,
느낌표처럼,
터질 듯 부푼 어떤 생의 입구마다 꽂혀 있다
애월 바다는 파랑주의보에 익숙했으리
검은색 따라간 며칠 새
몇 개의 부음을 받았다
길 전체가 목관악기인 애월에서의 해미 같은
♧ 인생 - 이재무
--애월에서
저무는 먼 바다 먹빛으로 잔잔한데
방파제 둑 위, 할머니 한 분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네, 유모차 밀며.
흑백의 풍경 속 몇 겹으로 주름진 시간
고여 출렁이고 있었네
저무는 먼 바다 하늘로 이어지는 지평선에서
노을은 가지를 떠나는 꽃잎같이 점으로
흩어져 선홍이 낭자한데
거북처럼 낮게 몸 웅크린, 지금은 다만
묵직한 침묵으로 밤을 기다리는,
밤이 오면 어화 피고 먹물 튀기며
비린내 땀내 진동할 오징어잡이 선박들
등 뒤에 두고
방파제 둑 위, 등이 활같이 휜 할머니 한 분
천천히 실루엣으로 걸어가고 있었네,
아주 먼 미래를 밀며.
♧ 애월 - 이수익
제주에 가면 꼭 한번 가보라던
애월, 그 바닷가 마을은
결국 가보질 못했다.
파란 바닷빛이 눈부시게 아름답다던
네 말이 무슨 비망록처럼 자주 떠오르곤 했지만
제주가 초행인 아내를 위해서는
성산일출봉과 민속촌, 정방폭포, 산굼부리 등속의
관광명소를 먼저 보아야 했으므로
결국 그 곳은 가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잘된 일,
애월은 이제 '다음에......'하고 내 가슴 깊이 묻어둘
애틋한 그리움의 한 대상이 되었으므로
미지의, 선연한 푸른 바다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오랜 날들을 나는 즐겁게 시달리리라.
애월, 가슴에 품고 싶은
작은 기생(妓生) 같은,
그 이름 떠오를 적마다.
♧ 애월 - 조정
바다가 와서 부딪는 소리 끌고 내륙으로 가는
어둠들 뒤에서
달이 미끄러지는 소리를 들었어요
당신도 더 깊은 잠속으로 가라앉으며
등으로 우는
내 소리를 듣기는 들었겠지요
꿈이 저 혼자 일어나
검은 바위 끝에 대롱대롱 달려 자맥질 하는 동안
올 풀어진 뜨게 옷 등판만 입고
나는 잤어요
투신한 달을 삼킨 채 마음이 한 눈금도 더하지 않은
바다를
코끝까지 당겨 덮었지요
비렸어요.
♧ 가문동 편지 - 정군칠
낮게 엎드린 집들을 지나 품을 옹송그린 포구에
닻을 내린 배들이 젖은 몸을 말린다
누런 바다가 물결 져 올 때마다
헐거워진 몸은 부딪쳐 휘청거리지만
오래된 편지봉투처럼 뜯겨진 배들은
어디론가 귀를 열어둔다
저렇게 우리는,
너무 멀지 않은 간격이 필요한 것인지
모른다 우리가 살을 맞대고 사는 동안
배의 밑창으로 스며든 붉은 녹처럼
더께진 아픔들이 왜 없었겠나
빛이 다 빠져나간 바다 위에서
생이 더욱 빛나는 집어등처럼
마르며 다시 젖는 슬픔 또한 왜 없었겠나
우리는 어디가 아프기 때문일까
꽃이 되었다가 혹은 짐승의 비명으로 와서는
가슴 언저리를 쓰다듬는 간절함만으로
우리는 또 철벅철벅 물소리를 낼 수 있을까
사람으로 다닌 길 위의 흔적들이 흠집이 되는 날
저 밀려나간 방파제가 바다와 내통하듯
나는 등대 아래 한 척의 배가 된다
이제사 너에게 귀를 연다.
♧ 애월에 이르는 - 정윤천
너와 함께 갔던 적 있었다
처음엔 누구나 그리 여겼을지도 모를
기꺼운 오독의 길, 애월愛月은
사실은 물가의 달로 떠서 어룽거렸다
애월涯月로 흔들려도 길은 오히려 확연해졌다
물속의 들의 이랑은 검고도 푸르렀나니
검고도 푸른 삼단의 머리채를 바람의 일순이 와서 풀어헤쳤다
순식간에, 뒈싸진 바당*
바다는 오롯이 저에게로 젖고 말았는가
우리는 또 무엇으로, 가슴 속의 애월 하나쯤을 꿈꾸었는가
어디선가 점점의 은빛으로 가까워오는 선미船尾 몇 개가
길고도 오래 나부끼는
월광의 춤사위를 견뎌
더디면서도 오는 동안까지가
한사코는 애월에 이르는 길이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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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섬의 사람 하나는 저 말이 ‘뒤집혀진 바다’라는 뜻이라고 일러주었다.
♧ 애월(涯月) 혹은 - 서안나
애월에선 취한 밤도 문장이다 팽나무 아래서 당신과 백 년 동안 술잔을 기울이고 싶었다 서쪽을 보는 당신의 먼 눈 울음이라는 것 느리게 걸어보는 것 나는 썩은 귀 당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애월에서 사랑은 비루해진다
애월이라 처음 소리 내어 부른 사람, 물가에 달을 끌어와 젖은 달빛 건져 올리고 소매가 젖었을 것이다 그가 빛나는 이마를 대던 계절은 높고 환했으리라 달빛과 달빛이 겹쳐지는 어금니같이 아려오는 검은 문장, 애월
나는 물가에 앉아 짐승처럼 달의 문장을 빠져나가는 중이다
♧ 애월 - 엄원태
하귀에서 애월 가는 해안도로는
세상에서 가장 짧은 길이었다
밤이 짧았단 얘긴 아니다
우린 애월포구 콘크리트 방파제 위를
맨발로 천천히 걷기도 햇으니까
달의 안색이 마냥 샐쭉했지만 사랑스러웠다
그래선지, 내가 널 업기까지 했으니까
먼 갈치 잡이 뱃불들까지 내게 업혔던가
샐죽하던 초생달까지 업혔던가
업혀 기우뚱했던가, 묶여 있던
배들마저 컴컴하게 기우둥거렸던가, 머리칼처럼
검고 긴, 밤바람 속살을 내가 문득 스쳤던가
손톱 반달처럼 짧아, 가뭇없는 것들만
뇌수에 인화되듯 새겨졌던 거다
이젠 백지처럼 흰 그늘만 남았다
사람들 애월, 애월, 하고 말한다면
흰 그늘 백지 한 장, 말없이 내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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