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옛날처럼 보리밭이 많지 않다.
가난하던 옛 시절 제주의 6월 들판은
보리 익어가는 누런빛으로 가득했다.
논이 별로 없는 제주의 밭에는
그 많은 식구를 먹여 살릴
보리를 갈아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보리가 익어가기 시작할 무렵이면
마지막 남아 있던 보리쌀과 좁쌀이 떨어져
이른바 보릿고개를 넘겨야 했다.
설익은 보리를 베어다 말려 죽을 쑤어 먹든지
소 사료로 쓰는 밀기울을 구입해다
사카린을 넣어 떡을 해먹었다.
쑥떡과 버무리가 고급이던 시절
삘기를 먹어도 먹어도 배가 안 차고
변비 때문에 고생이 심했던 그 시절
♧ 보리가 익을 무렵 - 유진
샛바람에 찔려가며
둔덕을 오르던 아지랑이 아늘아늘
하늘 끝 멀다않고 떠나버린 후
겨울 잔디로 왔던 청보리
봉긋봉긋 이삭을 달고
팽팽한 예닐곱 처녀 가슴처럼
봄물에 덩달아 꽃들 마구 필 때도
풀잎에 지나지 않았던 풀피리소리
가무레한 아이들의 신명만큼 흥이 돋고
질박한 사투리로 나물을 캐는
아낙들의 수다 위로
나비의 팔랑거림 유연해지면
호기심 찬 염소의 눈
갓난아기 배냇짓처럼 순해진다
살가운 햇살 부지런히 초록을 키워갈 때
오월의 매실처럼 여지없이 보리가 익는다
♧ 보리밭.2 - 김영천
보리누름이 한참이다
갯바람들이 그 위로 수런거리며 지나가긴 하지만
쉬이 흔적을 남기지 않는데
더러 함부로 쓰러진 곳이 있다
갑자기 길을 잃은 바람이 한동안
머뭇거리었던 것일까
깜부기 입에 탈탈 털어 넣어도 보고
삘릴릴리 삘릴릴리 보리피리도 불어보고
그렇게 한참이나 누웠다 갔을까
밭둑으로 푸르게 돋은 잡풀들이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바람의 길을 연다
후적후적 걸어나오니
그러면 내 한 평생이 바람인가?
♧ 보리밭에서 - 이진선
해남으로 넘어가는, 청자골 끝자락
떨어지는 햇살 등에 짊어지고
대나무 숲 은빛 사각거리는
소롯길 끄트머리,
청초한 보리밭 바람 따라 일렁인다
애틋한 마음, 가슴 한켠에 남겨두고
홀연히 떠난 그대
잊었던 기억들, 소리 없는 아픔
이랑마다 일어서고
허리 꺾인 바람
사방으로 흩어져 그리움이 넘실거린다
이젠, 알겠네
그대의 마음 전해오는 것을,
아직도
아스라이 밭머리에 서성이고 있다는 것을,
보리피리 소리 들으며
♧ 불면의 보리밭 - 김학산
지난 내 젊음은 긴 불면의 보리밭이었다
소금물에 피물집 터진 쓰라린 한겨울의 섬마을
노고지리를 통증처럼 뱉어 길을 내는 하늘가
구름의 무딘 펜촉이 물안개를 그릴 즈음
보리밭에 동그마니 앉아 한 땀 한 땀 초록의 수를
놓아가며 서리서리 파란 실핏줄을 지문처럼
심고 있는 여인이 있다
울어매가 있다
바람이 풋 살 벗는 소리 사각사각 들리고
황금빛 보리모가지 사이사이 세월의 켜켜한
지층에 쌓인 향긋한 어머니의 젖 내음은
차라리 기록할 수 없는 신화였네
그 해 아버지의 배는 귀향하지 않고
영원한 그리움의 안 쪽으로 회기 하였고
헐거운 날개 밑 열 세끼들마저 뭍으로 뿔뿔이
흩어진 뒤, 이제는
그 어떤 기쁨과 슬픔의 질량도 갖지 못한
깃털처럼 가벼운 울 어매여
오늘도 한낮 마늘쪽 같은 초승달로 둥둥 떠
하늘 가슴 그어 가며 온갖 그리움의 묵정밭만
일구시고 일구시고
늙은 고래의 음성으로
바다로 바다로만 향하여 우우………….
당신은, 내 삶의 지분 위에 새겨진
영원한 미개인
나는 당신의 뼛속 깊이 든 이명의
몹쓸 바닷바람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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