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우리詩’ 8월호와 잔대

김창집 2013. 7. 31. 10:03

 

  더위를 식혀 줄 ‘우리詩’ 8월호가 나왔다. ‘새는 가지를 가려서 노래하지 않는다’라는 홍예영 시인의 칼럼으로 시작하여, 김두환 김정화 하재영 송문헌 박경순 박현솔 정상하 김윤하 박원혜 박은우 장성호 한인철 이동훈 박홍 최병암 한문수 권기만 시인의 시를 모은 ‘신작시 17인 選’이 이어진다.

 

  시지 속 '작은 시집’은 이종암 시인의 ‘저마다, 꽃’외 7편과 권순진의 해설 ‘존재의 혼불에 용감무쌍 몸을 던지는 시인’,  유진 시인의 ‘해국海菊’외 4편과 최선옥의 해설 ‘비움과 채움의 미학’,  특집 ‘테마가 있는 소시집’으로 홍해리 시인의 ‘난초 꽃 한 송이 벌다’외 9편과 시작 노트 ‘난蘭은 무엇이고 난인蘭人은 누구인가?’가 실렸다.

 

  양선규의 ‘인문학 스프’는 ‘혼자라는 느낌’,  조영임의 ‘한시한담’은 ‘여지와 양귀비’.  특집 ‘시인들, 과학에게 듣다’로 조창호 교수의 ‘우주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수필 산책은 조윤수의 ‘명창정궤(明窓淨几)를 위하여’를 실었다.

 

  시지를 읽으면서 마음에 닿는 시를 골라, 지난 주말 나들이 때 수안보읍에서 아침 일찍 마을길을 산책하다 만난 잔대꽃과 같이 싣는다. 

 

 

♧ 봄풀 한 포기에 - 김두환

 

북한산 성벽(城壁) 밑돌들 틈새마다

억척스레 가까스로 바디로이 내민

봄풀 몇 포기들 싱싱하게 웃고 있네

 

겨우내 한파 이겨내고 드러낸

고행(苦行) 뒤 자신(自新) 모습

흥감 버리지 않고 서두르는 기색 없이

민낯 송곳눈이지만 흔연히 맞아

지난 삶 역정 진지하게 설명하네

 

그런 바람에

켕기지만 끌리고

 

그런 바람에

얕보았지만 쳐주네

 

그런 바람에

모아지면서 극복 정신 값 놓다가

내 투혼과 이리저리 비교하네

 

덩달아

모질고 끈질기고 절실한

생존 삶이 깨닫다가, 어쩐지

뜨개질되는가 싶어 좀 뒤로 움찔해지고

 

덩달아

보이지 않아도 어림으로

저 가슴 속 불길 곰곰 추측하니

이내 번져 와 뜨거워지므로 은근히

가다듬지 않을 수 없네

 

역시 봄은 설렘 발산 발신(發身)이네 

 

 

♧ 산은 바람으로 하여 큰다 - 김정화

 

바람이 오면서

내 가지에 놀던 바람

불러 앞세우고

투명한 하늘 아래

아스라이 먼 산 속으로 사라진다

 

그 산 속에

웃으면 살짝 마음 드러나는

골짜기의 꽃

바람 향해 얼굴 돌리는

또 다른 꽃

 

한때 머물었던

내 가지의 바람은 어디쯤에서

꽃을 열고 산을 키우며

서성이고 있을까

 

남김없이 주고 난 뒤 더는 줄 것 없어

숨죽이는 서글픈 나무는

우리가 잃어버리고 찾지 못한

오월, 무수한 눈빛들과 함께

어디쯤에선가 바람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 필사(筆寫) - 하재영

 

오디 먹은 검붉은 입술 저쪽

밤이면 별똥 수두룩 떨어졌다

 

우회도로 지나 산 넘고

시냇물도 건너

 

마음에 쓰고 또 적어보는

푸른 문장

 

북두칠성의 노래도

또렷하게 베꼈으면 좋겠다 

 

 

♧ 아마도 오월 - 박경순

 

  흰 철쭉이 한 철 현기증으로 지고 붓꽃 보라의 애절이 눈에 밟히려는데 절 마당으로 법어처럼 송화가 내렸다. 거기다 난감하게 찾아 든 어둠에 시야가 묶였다

 

  이 세상 빛으로 오셨다는 의자가 있었다지. 의자의 갈비뼈며 정강이까지 걸레로 지분지분 문지르는데 몸과 몸이 내는 소리를 견성이라고 귀띔하는 사문

 

  마찰로 빚어지는 소음이 번잡하여 고착된 발길 언제나 의자에 걸터앉을 수 있을까

 

  달그림자 성찰로 다녀가고 공연히 꺾인 꽃대만 끌어다 의자에 앉혀 놓던 그해 오월

  해마다 석등의 귀가 입에 걸리겠다. 

 

 

♧ 하늘 맛보기 - 한인철

 

우물 안에서 자란 새가 하늘을 보다

돌벽을 딛고 한발 한발 올라온

하늘 때문에 돋친 날개다

 

없을 때는 몰라도 새 꿈이 생긴 거니

하늘로 올라봐야 하늘 맛을 알지

날개가 있어도 날지 못하면 헛꿈이야

 

너는 하늘을 나는 꿈을 꾸면서

천 번을 백 번 저은 날개니

이젠 푸른 하늘을 누려도 좋다

 

하늘을 날며 디딤돌 세상도 보라

하늘만 보던 눈꺼풀이 벗겨진 찰라

무지개 같은 신천지가 또 펼쳐지리라 

 

 

♧ 저마다, 꽃 - 이종암

 

사월 산길을 걷다가, 문득

한 소식 엉겁결에 받아 적는다

 

-저마다, 꽃!

 

연두에서 막 초록으로 건너가는

푸름의 빛깔 빛깔들

제 각각인 것 모여, 사월의 봄 숲

총림叢林이다

 

  굴참나무너도밤나무개옻나무고로쇠나무단풍나무소나무오동나무산철쭉진다래산목련아까시나무때죽나무오리나무층층나무산벚나무싸리나무조팝나무물푸레나무……,

 

꽃을 가졌거나 못 가졌거나

몸의 구부러짐과 곧음

색깔의 유무와 강약에도 관계없이

온전히

함께 숲을 이루는 저 각양각색의

나무, 나무들

 

사람들 모여 사는 세상 또한, 그렇다

저마다 꽃이다  

 

 

♧ 비, 비, 비비추 - 유진

 

너저분한 꽃대를 자르려다

멈칫,

 

여리디여린 촉수 하나로

격렬한 수난을 치러낸 여자

끓은 땡볕에 배 불리던 여자

기도문이 해지도록 쪼그라들기를 마다않은 여자

 

광활한 우주 한켠에 하늘하늘 살아

듬성한 머리카락 매만지며 수줍게 웃는

주름살 거뭇거뭇 빛나는 여자

 

늙음을 모독할 누가 있을까

 

가위를 내려놓고

한 걸음

마른 꽃대무리를 비켜선다 

 

 

♧ 난초꽃 한 송이 벌다 - 홍해리(洪海里)

 

  처서가 찾아왔습니다 그대가 반생을 비운 자리에 난초꽃 한 송이 소리 없이 날아와 가득히 피어납니다 많은 세월을 버리고 버린 물소리 고요 속에 소심(素心) 한 송이 속살빛으로 속살대며 피어납니다 청산가리 한 덩이 가슴에 품고 밤새도록 달려간다 한들 우리가 꽃나라에 정말 닿을 수 있겠으랴만,

 

  피어나는 꽃을 보고

  그대는 꽃이 진다 하고

  나는 꽃이 핀다 하네.

 

  피고 지고 피고 지고

  피고 지면서

  목숨은 피어나는데……,

 

  참 깊은 그대의 수심(水深)

  하늘못이네.

 

  우리가 본시부터

  물이고 흙이고 바람이 아니었던가

  또는 불이 아니었던가.

 

  그리하여 물빛과 하늘빛 속에는 불빛도 피어나 황토빛 내음까지 실렸습니다 올해에도 여지없이 처서가 돌아와 산천초목들이 숨소리를 거르는데 늦꽃 소심 한 송이 피어 깊이깊이 가슴에 들어와 안깁니다.

 

  푸르르르르 백옥 같은 몸을 떨며 부비며 난초꽃 한 송이 아프게 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