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디카 일기

한라산과 여름 숲길

김창집 2013. 7. 19. 00:24

* 붉은오름에서 본 한라산 

  

붉은오름으로 가는 길인데

갈 때까지 차로 가보자고 한다.

그래서 새로 만든 길을 따라 차를 달리다 보니

어느덧 족은노로오름 초입에 이르렀다.

 

원래 붉은오름 취재길은 그게 아니라고

거기서 가는 건 아무 의미 없다 하길래

이왕 지질학자와 식물학자가 동행한 길이니

가까이 있는 '쇠질못'이 어떤 곳인지 가보고

그게 분화구인지 확인하자고 했다.

비가 온지 오래여서 쇠질못에는

물이 고여 있지 않고, 늪지 형태로 있었는데

분명히 분화구로 판명되었다.

 

다시 돌아와 시간을 체크하며 붉은오름에 오른다.

전설에 의하면 김통정 장군이 여몽 연합군에 대항해

최후의 결전을 치른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병사들이 모두 최후를 맞았을 때 비로소

부인과 함께 자결해 오름이 피로 물들었기에

그 이름을 붉은오름이라 했다는 얘기다.

 

숲길을 걸어, 내를 건너면서 봐도

지금 그 자취는 찾을 길 없는데

시원한 바람으로 더위가 온데간데없다.

능선 곳곳이 트이어 한라산을 비롯한

주변 오름들을 살필 수 있어 좋았다. 

 

* 가다 들른 쇠질못

 

♧ 여름 숲 - (宵火)고은영

 

졸음과 졸음 사이 내 안을 선회하는 작은 새들

절기의 연산 작용이 한참 뜨겁다

뜨거운 감각이 여름 한낮을 달구고

풀빛 향 실어 나르는 바람도 더위를 식히지 못하고

여름과 소통하는 향기나 노래 속에

나는 더위를 뭉개고 있다

 

나에겐 언제나 그대가 있지만

이 한나절 무엇이 나를 이토록 미치게 하는가

철 지난 기억 몇 줄

나른한 시간대에 붙들려 누운 자리

노오란 새 한 마리 느티나무 가지를 박차고

꿈결처럼 여름을 날아오른다

환상의 색조 언제 보아도 또다시 보고 싶다

푸드득 날아오르는 푸르고 푸른 깃털들

 

푸른 소음들을 버리고 맥없이 주저앉는

저 어느 갈 빛 어둠의 골목은 여름으로 다시 설레고

꿈을 쏘아 올리는 하늘 동동 떠가는 구름 들의 출렁임

여름 여름 코끝에 감도는 그리운 향기

엊그제부터 울기 시작한 매미들의 맹목적인 소리도

내 졸음의 영역을 침범하지 못하네

 

그대는 나의 영원한 레드그린 심장을 뛰게 하는 힘

그대는 내 안에 맑은 강물 항상 청결한 불루벨벳

나는 그대로 인해 웃고 그대로 인해 행복하고

그대로 인해 미소하나니

그러므로 그대는 오로지 내 영혼의 아름다운 지주

당장 배고픈 우울도 위로받는 그대는 나의 단단한 믿음

실존하지만 보이지 않고 늘 가슴 안에서나 뛰노는 어린 새

숲은 생명을 일으키는 떨리는 기적

 

건강한 거지

깜작새 졸음새 천국새 눈물새

내가 부르는 그리운 이름들  

 

* 가다 만난 냇가(위)와 단풍나무(아래)

 

♧ 그해 여름 숲 속에서 - 우당 김지향

 

이른 아침 산을 오른다

 

아직 바람은 나무를 베고 잔다

동쪽 하늘에 붉은 망사 천을 깔던 해가 숲을 깨운다

숲은 밤새 바람에게 내준 무릎을 슬그머니 빼낸다

베개 빠진 바람머리 나뭇가지에 머리채 들려나온다

 

잠 깬 산새 몇 마리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그네를 뛰는 사이 숲들이 바람뭉치를 머리 위에 올려놓고

북채가 된 가지로 산새의 노래를 바람 배에 쏟아 부으며

탬버린이 된 바람 배를 치느라 부산떤다

 

입 다물 줄 모르는 가지가 종일 바람바퀴를 굴린다

숲 속은 온종일 탬버린 소리로 탱탱 살이 찐다

세상을 때려주고 싶은 사람들은 왼쪽에서 오른 쪽으로

아래서 위로 숲을 안고 돌며 바람바퀴를 굴리는

숲의 재주를 배우느라 여름 한 철을 숲에서 산다

 

 

* 비목나무(위)와 산딸나무(아래)

 

♧ 여름 숲 - 권옥희

 

언제나 축축이 젖은

여름 숲은

싱싱한 자궁이다

 

오늘도 그 숲에

새 한 마리 놀다 간다

 

오르가슴으로 흔들리는 나뭇가지마다

뚝뚝 떨어지는

푸른 물!

   

* 붉은오름에서 본 노로오름(위)과 살핀오름(아래)

 

♧ 여름 숲에서 - 박인걸

 

당신의 기운이 충만한

칠월의 숲속에서

아담의 이비인후의

루하흐를 경험합니다.

 

참 솔이 내뿜는

살균의 효능이나

떡갈나무 잎의

피톤치드가 아닙니다.

 

정수(淨水)된 공기와

아침 같은 고요가

찬란한 햇살과 섞여

한껏 채워지는 편안함보다

 

더 충만한 생명의 신비가

오염된 영혼을 감싸며

무성(無聲)의 광선으로

세속의 욕망을 녹입니다.

 

누구도 채워줄 수 없고

이끌 수 없는 힘이

숲속을 걷는 나의 온 몸을

강력하게 포옹합니다.  

 

* 한라산 오른쪽으로 영실, 이스렁, 볼레오름(위)과 삼형제오름(아래)

 

♧ 곶자왈 - 김종제

 

꽃 피는 남방한계선과

꽃 지는 북방한계선의

경계에 서 있어

내가 오름의 곶자왈 같다

덩굴과 이끼와 암석이 뒤섞여

생이 온통 어수선하다

허기도 한기도 녹아 스며들어

지상에서 결코 볼 수 없는 꽃

천냥금을 키운다

물 속에서 건져올린 삶이 모여

살 부여잡고 있어서

부엌 아궁이처럼 따뜻하다

독기 걸러내는 허파 같고

축축하게 젖어있는 그 속이

언젠가 내가 머물렀던 아득한 방

자궁 같아서

나도 저 곶자왈처럼

벌나비 날아드는 꽃을 잉태하고 싶다

날고 드는 온갖 짐승 불러와

잠재우는 숲을 잉태하고 싶다

나도 저 곶자왈처럼

배 띄우지 못하고

노숙으로 지친 발걸음

깊숙하게 뿌리 내리게 하여

한 끼 국밥 같은

열매의 섬을 잉태하고 싶다

곶자왈 오르면

한 세상 변치 않는다는

붉가시나무의 마음을 보아야겠다

 

* 어승생악(왼쪽)과 족은드레오름(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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