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24절기의 하나인 백로(白露).
들녘의 농작물에 흰 이슬이 맺히고
가을 기운이 완연히 나타나는 때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른 아침에 문을 열고 앉았는데
언제 더웠냐 싶게 으스스한 기운이 돈다.
절기는 속일 수 없다더니….
요즘 빈터에 가보면
미국자리공이 그 땅의 주인인 양
마음놓고 자라고 있는 걸 볼 수 있다.
미국자리공은 자리공과에 속한 한해살이풀로
보통 높이 1~1.5m정도 자라고,
긴 타원형의 잎이 어긋나며,
6~9월에 붉은빛이 도는 백색 꽃이 총상 꽃차례로 피는데
열매는 적자색으로 익으며, 과거 잉크 대신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북아메리카 원산으로 대기 오염이 극심한 지역에 서식하며
주위의 땅을 강한 산성으로 변모시키는 독초로 알려졌다.
♧ 백로 - 박인걸
대지를 뜨겁게 달구던 태양도
선선한 바람에 맥을 못 추고
짙푸르게 무성하던 숲도
어쩔 수 없이 빛이 바래는구나
절정으로 치닫던 참매미노래도
이제는 종적을 감춘
구슬픈 귀뚜라미 소리만
가을이 문턱에 있음을 알린다.
한 시절이 가고 오는
일정한 순환의 법칙 아래
머물고 싶어도 머물 수 없는
젊은 날의 아쉬움이여
풀잎을 흠뻑 적시는 아침이슬은
젊음을 잃는 슬픔의 눈물일까
되돌릴 수 없는 운명 뒤안길에서
잎 새를 흔드는 바람처럼
못내 아쉬운 섭섭함이여
꽃잎은 점점 시들고
나뭇잎 한 잎 두 잎 질 때면
여문 알맹이들만이 빛나겠지만
푸르름이 사라질 들판에서
초점 잃은 사슴의 눈망울처럼
멍하게 하공만 바라다본다.
♧ 귀뚜라미 - 혜천 김기상
너희를 일러
가을의 전령사라 했더냐
귀뚜르 귀뚜르 귀뚜르르
귀뚫어라 귀뚫어라 귀를 뚫어라
해넘이 저녁녘부터
해돋이 새벽녘까지
어지간히도 울어대는구나
그토록 목이 쉬도록
고스란히 밤을 새워 울부짖음은
가을이 오고 있다는 소리냐
가을은 이미 와 있다는 소리냐
아니면
이제사 입을 모아
제발 서둘러 와 달라고 보채는 소리냐
모레면 이슬이 내린다는 백로(白露)
길가에 심어진 코스모스들
서둘러 꽃을 피워내고 있으니
정녕 가을이 곁에 와 있음을 알겠구나
오냐
귀를 열어 듣고 있느니라
너희가 전하고자 하는 이런저런 소식을.
♧ 가을이 익는다고 소리지를 건 무엇인가 - 조찬용
얼마 전까지 젖이 퉁퉁 불어
청둥오리와 백로에게 젖을 먹이던 저수지다
밤이면 아랫마을까지 몰래 달빛을 건너 밟고선
약이 오른 고추에도 젖을 물리고
가을에 목이 말라 노랗게 고개를 숙이는 벼들에게도
젖을 물리고
하루가 다르게 말라 가는 퍼석퍼석한 가슴을
햇빛 때문이라고 시치미를 떼었다
한가하게 쪼그려 앉은 등허리로 가을이 쓸쓸하다
암암리에 등이 갈라진 저수지에
문득 마음이 짠해진다
제방에 오줌 한 번 누워보지 못하고
누구에게 눈물 같은 물길 한 번 되어보지 못하고
환장하게 가을이 익는다고 소리지를 건 무엇인가
♧ 자리공 - 김승기
보았는가
늘 비어있음이
가득한 자리
멀쑥한 키 굵다란 줄기로
하늘 한가운데를
쿡쿡 찌르며 건드리고 놀다가
확 덮어씌운 보쌈
넓은 이파리에
우주가 갇혔네
몇 가닥
실낱같이 가느다란 꽃줄기 내밀어
희붐히 뿜어내는 향
“나 여기 있소.” 하며
비어 있어도 있는 건 다 있으니
보잘것없다 말하지 말라네
♧ 다시 또 달빛에 대하여 - 문효치
양수리 어디께 와서
달빛 한 마리 건져 올렸다.
아가미에 슨
검은 녹을 닦아내고
갈대들, 더운 입김으로
꽃을 만들어 올렸지만
피어오르는 것은
연기에 그슬린 검덩이었다.
저만치 언덕 기슭에
미국자리공
자리 잡고 앉아 있었다.
♧ 동강을 보며 - 김종익
통증을 호소하는
등 굽은 물고기
개울에 가재 도룡뇽
사라진지 오래다
강둑에 공해에도 끄떡 없는
미국자리공 무성한데
마음은 관절염 환자처럼
쑤시고 아프다
♧ 망해사(望海寺)에서 처용가를 - 김태수
울산 망해사에서는 바다가 보이지 않는다
이따금 바람 몇 바다 쪽에서 와서는
잠시 머물다 옹아리 한 타래 풀어놓고는
대웅전을 한 바퀴 돌아 나간다 무심코
푸른 솔바람과 몸 섞고 바다로 간다
아직도 동해 바다를 희망이라고 했는가
보지 않아도 안다 적조와 폐유 뒤엉켜 누운 바다
검붉게 시든 돌미역과 이름 모를 바다풀을
아직도 닦아내고 있을 늙은 어부의
굵은 눈 주름을 타고 눈물이 흐를 것이다
그 옛날 아련했을 안개와 구름은 어디 갔을까
처용이여 그대의 땅은 온통 공장 굴뚝만 무성하고
매운 연기 지천에 가득하다 병든 들판은 불임 중
저녁답 소슬바람에도 눈을 감는다
미국자리공*의 붉은 대궁에 황혼이 내린다
그래, 서울 밝은 달에 밤새도록 노닐다가
돌아와 잠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로구나
둘은 내 것인데 둘은 누구 것인가
본래 내 것이지만은 빼앗긴 것은 어찌할거나
망해사*에서는 끝끝내 바다를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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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해사-신라 헌강왕이 동해 용왕을 위하여 지었다는 절, 처용설화와 관계가 있음
*미국자리공-북아메리카 원산의 대표적 공해 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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