칡꽃을 바라보면 어쩌면 저리도 투박한 모습으로 피어났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언젠가 넝쿨 위로 학처럼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피어 있는 맵시에 감동해 달콤하면서도 그윽한 향기를 맡으며, 사람에 비유해 소위 ‘인간성’이란 걸 생각하게 되었다. 수수하고 촌스러우면서도 사람 냄새를 풍기고, 때에 따라서는 학처럼 고집스런 데가 있는 그런 꽃이다.
언젠가 산에 오르려고 절 동네에 묵었다가 동동주에 도토리묵이 너무 좋아 시작한 술이 한도를 넘어, 아침에 일어나 속을 다스리려 허둥대다가 마침 생칡즙을 파는 곳이 있어, 거푸 두 컵을 사 마시고 아침도 거른 채 거뜬히 산에 올랐던 좋은 기억이 있다. 요즘엔 칡꽃을 가지고 갈화차를 만들어 마시고, 효소를 만드느라 한창 잎이야 꽃이야 따고 야단들인데, 그게 그리 효능이 있을까?
어제는 고조할아버님 이하 부모님까지 한데 모여있는 가족묘지에 벌초를 갔다. 얼마 전에 온 비 덕분인지 꽃들이 많이 피어 있는 걸 목격하고서도 벌초를 않고 먼저 꽃으로 달려가면 동생들과 조카들이랑 아주머님들이 흉볼까봐 꽃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벌초가 끝날 때까지 먼 거리에 두고 보면서 갈등(葛藤)했다. 이 칡꽃을 비롯해서 으아리와 사위질빵, 달개비, 왕고들빼기, 송장풀, 여우팥 등등…. 특히 강아지풀은 한가득 모여 있어 좋은 그림이 나올 것 같았는데….
다 끝나 차례를 지낸 뒤 음복까지 마치고 나서야 렌즈를 바꿔 끼고 아래 밭으로 넘어 갔는데, 햇볕이 너무 강렬하여 새 렌즈에 적응하느라 왔다갔다 하다보니, 갈 사람 먼저 가고 나를 태우고 간 동생이 조카를 데리고 차를 닦으며 빨리 왔으면 하는 표정이다. 되는 대로 몇 컷 누르고 차로 달려온다. 늦었다. 가외로 꽃을 찍는 일은 이렇게 눈치를 보인다. 사실 예민하고 작은 꽃들은 아침 일찍이라야 꽃술도 상하지 않은 채로 있는 법이어서, 다음을 기약하기로 한다.
♧ 칡꽃(182) - 손정모
다가서면 열릴 듯한
산모롱이
한참 다가서다 보면
산의 형상은 없어지고
산을 옥죄는 칡덩굴만
지천으로 어우러져 있다
아는가
산으로 어우러지기 위해
얼마의 세월 흘렀는지를
산으로 자리 잡기까지
얼마나 많은
분란과 소요가 있었는지를
허나, 대답 대신
샘물처럼 우아하게 미소 짓는
남보랏빛의 칡꽃
♧ 갈전곡봉(葛田谷峰) 칡꽃 - 권경업
갈전곡봉 칡넝쿨
밀치고 당기고 휘감고
할퀴고 쪼면서도
어제 같은 오늘 살아가는데
뇌성벽력 장대비 퍼부을 때는
오히려 그 삶이 힘이 되어서
흰머리메 큰 줄기
거친 너덜에
질기고 모질게 아래로만 긴다
비 개이는 아침 내일을 위해
한뿌리의 의지 악착같이
줄기줄기 홍자색
꽃을 피우는구나
사람들아
아랫동네 갈전리
황시댁 텃밭에서
햇감자
하얀 속살로 살쪄가고
북녘 북청땅 희사봉 아래
측산포 비탈에도
옥수수알 희망처럼
노랗게 여물어 가는데
좌절과 절망은 오히려 희망이 되어
내일로 가는 오늘
칡밭골봉 칡꽃 같은 꽃을 피우소
♧ 칡덩굴 - 김완하
저렇듯 얽혀 사는 아름다움을 보라
험한 비탈길 함께 기어오르는,
하나의 뿌리로 여러 개 하늘을 품고
무더기 무더기 꽃을 피우는
아픔으로 얼크러져 바로 서고
서로의 상처를 온몸으로 감싸주며
가파른 어둠 벼랑을 타고 올라
죽음까지도 함께 지고 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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