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저녁으로 꽤나 쌀쌀해지고
추석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며칠 전 장애우들과 함께 했던 산행
천천히 노루생태공원을 지나
편백나무 숲에 다녀오다 만난 노루
어렵게 돌틈으로 찍어보았다.
권경업 시인께서
얼마 전에 보내온 시집
‘뜨거운 것은 다 바람이 되었다’에서
가을시편을 몇 편 골라 같이 내보낸다.
♧ 그리운 이름
내가 아는 어느 이름
字間(자간)과 자간에는
바라보기 아쉬운 하늘이 있다
어디선가 마른 상수리 숲 내음이 나고
무리 지어 길 떠나는 방울새
그 뒤를 따라 시퍼렇게 물들어 가는 그리움
다시는 가지 말아야지
가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아득히 그 하늘 건너가는
나는 억새꽃, 하얀 바람
바람이구나
♧ 이 땅에 그나마
이 땅에 그나마 몇 남지 않은 산자락
대원사 지나 시오리 조릿대밭 길
간간이, 굴참나무 낙엽
하릴없는 내 나이처럼 쌓여 가는 곳
봉우리마다 피는 바람꽃, 기다림에 야윈 가슴 위해
세평 뜨락 아무렇게나 마른 풀섶에서
풀벌레는 제 명을 깎아서 운다
어찌 들으면, 눈물처럼 솟는 설움 같기도 하고
어찌 들으면, 밤새 부를 초혼가 같기도 한 소리
별이 되어 버린 그리움들
밤하늘 가득 돌아오라며 불 밝힌 처마 끝
비탈의 나무들 단풍 든 지 오래, 이제는 잎마저 져
한 차례 소슬바람 헤집고 간 뒤
이런 풍광에 담담해 하는 민씨
노구솥 가득 마가목술 내어 놓는다
이슥토록, 그리운 이를 그리워하는 이야기 끝에
산중의 이야기 시(詩) 아닌 것이 어딨겠냐만
마지막 사과알 여물어 가는 새재 아래 과수밭까지
어제는 전기가 들어오는 오늘은 새 도로가 닦이고
그 뒤를 따라 행락객 왁자지껄 들어온다며
그나마 몇 남지 않은 산자락 또 근심거리가 생겼다
♧ 가을바람
얼마나 많은 사연이기에
등ㅠ굽은 느릅나무 한 그루
우수수, 바람 편에 제 잎
저리도 띄워 보낼까
보시오, 누군들 저 나이라면
삶의 구비구비 두고 온 사연
구구절절 털어놓고 싶지 않겠소
하물며 다시 봄날로 간다는 바람 앞에
가시다가 부디 내 젊은 날 만나거든
저무는 산자락,
희끗희끗 회한(悔恨)의 머리 저어
오늘은 통음(痛飮)에 젖더라 전해주오
아직도 사랑한다 전해주오
♧ 모닥불
젖은 연기, 매운
눈불도 흘리다가
탁탁 소리를 내며
맹렬히 타오르기도 하다가
끝내 한 점 불씨,
한 줌 재로 살라버리는
불꽃은 인생이다
♧ 가을에게
배경으로 한, 한없이 투명한
너 푸른 빛 때문일까
보이지 않는 발걸음에 내 귀는 시리고
소리 없이 전하는 바람결에
들끓던 가슴은 스산하여
나는 서성인다
뜨겁던 여름날, 먼 빛으로
너를 예감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으나
준비되어 있지 않은, 이 아침이
그 어느 때보다 막막하여
나는 떨고 있다, 두려움은 아니라 말하지만
흔들리며 가야할 너와의 길이
저 쑥밭재 길섶 억새처럼, 밤마다
하얗게 울음으로 피어날 그 일이 걱정이구나
흔히들 쉽게 말하고 쉽게 지워버릴
그 무엇으로는, 정녕
너를 맞지 않으련다
♧ 가을 산행
세상살이 마흔이 넘으면
가끔 까닭 없이 울고 싶을 때가 있다
떠나는 가을 앞에서는 더욱
예전에는 그저 그러려니 했는데
고추잠자리 한둘씩 사라지고
모두 제 갈 길 바삐 가버리면
왠지 모를 설움은
그냥 그러려니 서 있을 수 없게 한다
여름날의 땀방울 거두어 간
빈 들녘의 언저리
흔들리는 계절의 창백한 억새밭에서
자꾸 빨리 떠나라며 보채는 바람에
나는 등 떠밀리며 실컷 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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