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중 밤과 낮의 길이가 같다는 절기,
가을의 대명사이기도 한 추분(秋分)이다.
그 지겹던 열대야가 사라진지는 꽤 오래되었지만
낮에는 아직도 더위를 실감하고 있다.
추석 이튿날에 달을 만나러
조금 일찍 오른 다랑쉬오름,
하늘을 날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오름 능선 위로 솟아올라 마음껏 비상(飛翔)하고 있었다.
가을이 찾아오는 날 추분절에
이 그림처럼 우리도 한 번 훨훨 날아보자꾸나.
♧ 언제부터 외로운가 - 박종영
꼭 이맘때,
그러니까 처서 물 지나고 백로 절기 지나,
추분이 되면 선선한 초가을 바람으로
먹먹해지는 가슴은 무엇이냐?
앙금 없이 걸러내는 마음 하나 갖고 싶어
이토록 참고 견뎌온 시절인데,
오죽이나 못났으면 그 흔한 쑥부쟁이
한 아름 모두 빼앗기고
슬금슬금 물러나는 꼴이라니,
구차하게 흔들리는 억새꽃 비웃음이
절로 나를 슬프게 한다.
눈치껏 산에 올라 외로움 타는 물푸레나무
알몸 만지는 자유가 있어서 좋고,
옹달샘 가까이 가면 시원한 물 한 모금
누가 먼저 마시고 갔는지 몹시 궁금하다.
산아래 끝자락,
새로운 시작을 위해 한 폭의 풍경으로 궁구는 낙엽,
그 우직한 생명의 무덤을 쌓고 있는 가을은
언제부터 외로운가?
♧ 경전(經典) - 고재종
차랑차랑, 순금 이삭 일렁이는
추분의 들판에 서서
먼 곳으로 고개를 드는 어머니의
수정 눈물은 나의 경전이다
지난 여름 큰비 큰바람에
죄다 꺾인 닷 마지기 논을
죄다 일으켜 세우고
당신의 허리가 꺾이어선
자리보전하던 어머니를 나는 안다
시방 김제 만경 들판에 가보아라
하늘이 어쩌려고
그토록 순금 햇살을 쏟아 붓는지
쏟아 부어선 따글따글 익히는 게
어머니의 수정 눈물은 아닐는지
지평선을 바라보지 말자
왕배야덕배야, 내가 가 닿을 곳은
저 논에서 피를 뽑다
피투성이 흙감탱이 몸으로
나를 낳고 낳은 어머니의 환한 품
죽어서 하늘로 가지 않고
저 시리게는 신신한 땅에 묻히는
어머니의 수정 눈물이
추호라도 삼가는 나의 경전이다
♧ 가을 단상 - 권오범
찰떡같던 햇볕
추분이 다가오자
서름서름 미끄러져
구조조정으로 술렁이는 산골짝
이미 생명수 꼭지는 잠갔을 테고
바람마저 하루가 다르게
밥맛없이 굴어
이파리들이 우두망찰하고 있다
허공을 힘차게 가르던
말매미들 사랑 타령도
벼들의 황금빛 묵념으로
볼 장 다본지 오래
세월 만난 코스모스
하늘 떠받들고
떼 지어 곤댓짓하자
거미치밀어 딴전인 수양버들
♧ 당신의 가슴에 가을 향기가 있는 것은 - 정세일
당신의 가슴에 가을 향기가 있는 것은
당신의 얼굴에 피어난 가을 바람 같은
미소가 그 옛날 어머니의 잃어버린 웃음 같아서
서글픔에 가슴이 아리는 가을향기입니다.
비가 와서 밭고랑이 패이고 여름장대비에
허리춤까지 쓸리서 넘어져있는
논을 바라보시면서도
힘들어하시거나 화내 시지도 않고
고무신까지 차오는 흙을 털털 터시던 어머니의
그 쓴웃음처럼 당신의 가을에는
그처럼 아무렇게나 들녘에 피어있는 들국화의
웃음을 간직 하셨었지요.
세월이 흐른 만큼보다도 언제나 가을 깊음이 있는
당신의 그 가을은 황금색의 들녘처럼 마음도 풍성하고
기다림의 향기가 있는 아름다운 가을이었지요
남을 위해 마음을 붉게 물들일 수 있는 그 마음 때문에
언제나 남을 위해 가을만을 당신의 마음처럼 곱게만 접으시더니
아무도 모르게 남몰래 보내주는 그 접혀짐 때문에
오늘 가을 바람이 부는 이곳에는
가슴이 붉은빛에 아리는 어머니의 가을향기도 있고
나의 가슴에도 붉은 노을을 걸 수가 있어서
당신의 마음처럼 붉게
나도 하늘을 접고 있더이다.
♧ 내 고향 - 박인걸
솔 잎 향이 숲에서 날아들고
갈잎 헹군 바람이 언덕을 내려오면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되던
때 묻지 않은 고향에 가고 싶다.
산에는 산꽃이 들에는 들꽃이
사시사철 줄지어 피어나는
무릉도원보다 더 아름다운
그리운 고향에 가고 싶다.
종달새는 하늘을 날고
염소 떼가 풀을 뜯고
맹꽁이가 밤마다 노래하던
내 고향 보다 더 좋은 곳 있을까.
냇물은 온 종일 지줄 대고
구름도 힘들면 쉬어가고
사철 꽃비가 곱게 내리던
어머니 품 같은 내 고향이여
♧ 시, 나의 시 - 이민정
나의 시는 새벽 한기를 걷어내지 못한다.
따뜻함을 불어 넣어도 생기는 늘 부족하고
연민으로 감싸 안아도 춥고 배고픈 듯 움츠려 있으며
상상만 있고 이론만 있는 그래서 아프다 만
덕지덕지 매달린 사념의 치장만이 남은
사랑만 있고 사람이 없는 시
사건만 있고 일상이 없는 시
비유도 비교도 아닌 슬픈 비주류
나의 시는 여행을 떠나고 싶어 한다.
먼길을 홀로 타박거리며 걷고 싶어 하고
빈 하늘을 날고 싶어 하고
초목이 우거진 숲길을 거닐고 싶어 하고
풀꽃 한 송이와 이중창을 부르고 싶어 하는
자연과 하나가 되는 시
스스로 풀내음을 내는 시
공기가 되고 바람이 되는 자유로움
나의 시는 버려지기 전에 먼저 비워낸 사랑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저절로 생겨나길 바라는 사랑
두려움만 살아남아 당당함을 모두 잃은
사랑 같지 않은 사랑
불사르기도 전에 타고 남은 재를 염려하는
비겁하고 안온하며 이기적이고 부끄러운
사랑이라는 이름이 버거운 사랑
나의 시는 낯. 선. 길에 홀로 주저 앉아 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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