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에 가공할만한 태풍이 몰아쳐
수많은 희생자를 내
전 세계인의 온정의 손길이 모아지는 가운데,
우리나라에서는 갑자기 엄습한 한파로
바로 겨울로 가버리는 게 아닌가 했는데
엊그제는 그런 대로 날씨가 풀려
오름을 전전할 수 있었습니다.
일요일은 도저히 가만있을 수 없어 한라생태숲과 샛개오리
화요일은 장애우들과 족은노꼬메
수요일은 궁금해서 한라수목원 광이오름
목요일은 제민일보 팀과 취재차 좌보미오름,
그 중 한라생태숲에서 스케치한
만추의 현장을 보여드리겠습니다.
♧ 만추(晩秋) - 엄원용
춘천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북한산 밑을 지났다.
산의 계곡 아래쪽으로는
단풍이 다투어 제 몸을 불태우고 있었다.
그러나 등성이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나뭇잎들은
이미 제 빛깔을 잃고 바람에 우수수 떨어지고 있었다.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나뭇잎들은 여름날의 찬란했던 그 빛깔들을
가볍게 내려놓고 아주 홀가분히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작별이었다.
한 때 온 몸을 감싸고 있던 붉고 푸르던 빛깔들이
차츰 그 빛을 잃어 다해 갈 때쯤이면
우리도 떠나야 하는 단풍이겠거니
그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이별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버스가 지나는 북한 산 길
노을이 지는 나무 사이로 단풍이 곱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 만추(晩秋) - 박후식
다 떠났거나 떠날 준비를 마치고 있을 때
저문 열차가 굽은 궤도를 돌아 수림 속으로 빠져들고
우수수 나뭇잎이 흩어지며 있을 때
아직도 들에서 돌아오지 않는 아우구스티누스를 기다리며
긴 허공에 빠져 있을 때
간솔 냄새가 아궁이 속으로 타들어가고
밭두렁에서는 묵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을 때
가을이 성문 밖으로 사라지고
골목 끝 빈집 외등이 어둠으로 젖어 있을 때
긴 여행애서 돌아와 문밖에서 너를 보고 있을 때
그때 노래하리라, 사랑한다고
♧ 만추(晩秋) - (宵火)고은영
설움일레라
음력 구월 초엿새
초저녁 초승달만 초롱불 같은 하늘가
열병 같은 만추(晩秋)도 한참이라
해일처럼 밀려드는 임 향한 가슴으로 애절하오나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요즘 세상
사랑도 취기가 올라 먼 산 바라듯
홀로 삭이는 그리움 만삭이라 배가 부르나
추수를 기다리는 맘 거둘 게 없는 처소에
그리운 눈물임에랴
낙엽 같은 몸
길은 이미 어두움에 접어들어 쇠락해 가도
마음은 내 어찌 연분홍 꽃잎이 아니오니까
♧ 만추(晩秋) - 권경업
야윌 대로 야윈 오후 햇살
울먹이다 떠나간 떡갈나무 숲
밤마다, 별이 되어버린 그리움들
내 잠든 천막 위
하얀 서릿발로 내려앉았다
소슬바람, 앙상한
이 계절 아름답다는 것
허튼 제 약속 허둥대며 쫓아온
마흔에야 겨우
♧ 晩秋 - 이정웅
늦가을 산이 골짜기 속으로
느릿느릿
걸어 들어간다
빛 몇 자락 짊어진
마른 물길이
비척비척
따라 올라가는
헐렁한 짐 속엔
아직 내려놓지 못한
가랑잎 몇 점
삐죽이 내밀고 있다
♧ 만추 - 정군수
숨어있던 내 작은 뜰에도
낙엽들이 몰려와
가을은 어디에도 지천이다
남루를 걸친 사내가
가을을 껴안고 뒹굴다가
불려온 바람 속으로 침몰한다
잎 진 가지 사이로
하늘을 기대고 선 나무들이
인간보다도 고독하다
죽어 넘어진 나뭇잎들이
구르는 차바퀴 아래로
또다시 몸을 던진다
쇳소리보다 날카로운 달이
여인의 냉소처럼 떠있는
도시의 건물 사이를 지나
장례식장으로 가는 불빛들이
가을 속으로 잠겨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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