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디카 일기

만추, 한라산 기슭에서

김창집 2013. 11. 15. 00:08

 

필리핀에 가공할만한 태풍이 몰아쳐

수많은 희생자를 내

전 세계인의 온정의 손길이 모아지는 가운데,

우리나라에서는 갑자기 엄습한 한파로

바로 겨울로 가버리는 게 아닌가 했는데

엊그제는 그런 대로 날씨가 풀려

오름을 전전할 수 있었습니다.

 

일요일은 도저히 가만있을 수 없어 한라생태숲과 샛개오리 

화요일은 장애우들과 족은노꼬메

수요일은 궁금해서 한라수목원 광이오름

목요일은 제민일보 팀과 취재차 좌보미오름,

 

그 중 한라생태숲에서 스케치한

만추의 현장을 보여드리겠습니다. 

 

 

♧ 만추(晩秋) - 엄원용

 

춘천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북한산 밑을 지났다.

산의 계곡 아래쪽으로는

단풍이 다투어 제 몸을 불태우고 있었다.

그러나 등성이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나뭇잎들은

이미 제 빛깔을 잃고 바람에 우수수 떨어지고 있었다.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나뭇잎들은 여름날의 찬란했던 그 빛깔들을

가볍게 내려놓고 아주 홀가분히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작별이었다.

한 때 온 몸을 감싸고 있던 붉고 푸르던 빛깔들이

차츰 그 빛을 잃어 다해 갈 때쯤이면

우리도 떠나야 하는 단풍이겠거니

그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이별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버스가 지나는 북한 산 길

노을이 지는 나무 사이로 단풍이 곱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 만추(晩秋) - 박후식

 

다 떠났거나 떠날 준비를 마치고 있을 때

저문 열차가 굽은 궤도를 돌아 수림 속으로 빠져들고

우수수 나뭇잎이 흩어지며 있을 때

아직도 들에서 돌아오지 않는 아우구스티누스를 기다리며

긴 허공에 빠져 있을 때

간솔 냄새가 아궁이 속으로 타들어가고

밭두렁에서는 묵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을 때

가을이 성문 밖으로 사라지고

골목 끝 빈집 외등이 어둠으로 젖어 있을 때

긴 여행애서 돌아와 문밖에서 너를 보고 있을 때

그때 노래하리라, 사랑한다고

 

 

 

♧ 만추(晩秋) - (宵火)고은영

 

설움일레라

음력 구월 초엿새

초저녁 초승달만 초롱불 같은 하늘가

열병 같은 만추(晩秋)도 한참이라

해일처럼 밀려드는 임 향한 가슴으로 애절하오나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요즘 세상

사랑도 취기가 올라 먼 산 바라듯

홀로 삭이는 그리움 만삭이라 배가 부르나

추수를 기다리는 맘 거둘 게 없는 처소에

그리운 눈물임에랴

 

낙엽 같은 몸

길은 이미 어두움에 접어들어 쇠락해 가도

마음은 내 어찌 연분홍 꽃잎이 아니오니까

  

 

♧ 만추(晩秋) - 권경업

 

야윌 대로 야윈 오후 햇살

울먹이다 떠나간 떡갈나무 숲

밤마다, 별이 되어버린 그리움들

내 잠든 천막 위

하얀 서릿발로 내려앉았다

 

소슬바람, 앙상한

이 계절 아름답다는 것

허튼 제 약속 허둥대며 쫓아온

마흔에야 겨우  

 

 

 

♧ 晩秋 - 이정웅

 

늦가을 산이 골짜기 속으로

느릿느릿

걸어 들어간다

 

빛 몇 자락 짊어진

 

마른 물길이

비척비척

따라 올라가는

 

헐렁한 짐 속엔

 

아직 내려놓지 못한

가랑잎 몇 점

삐죽이 내밀고 있다   

 

 

♧ 만추 - 정군수

 

숨어있던 내 작은 뜰에도

낙엽들이 몰려와

가을은 어디에도 지천이다

남루를 걸친 사내가

가을을 껴안고 뒹굴다가

불려온 바람 속으로 침몰한다

잎 진 가지 사이로

하늘을 기대고 선 나무들이

인간보다도 고독하다

죽어 넘어진 나뭇잎들이

구르는 차바퀴 아래로

또다시 몸을 던진다

쇳소리보다 날카로운 달이

여인의 냉소처럼 떠있는

도시의 건물 사이를 지나

장례식장으로 가는 불빛들이

가을 속으로 잠겨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