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병 시인이 이번에 낸 새 시집
‘11월엔 그냥 젖고 싶어’를 읽었다.
그의 일상사가 들어 있는 시들을 읽으며
글 속에 절절이 배어 있는 고독을 실감한다.
그 고독을 조금 나누어 볼까 하여
몇 수 옮겨 11월에 피어 차디찬 골목을 장식하는
팔손이 꽃 사진과 같이 올려본다.
♧ 꽃이 된 사람
오늘은 첫눈이 오는 날로 기억되기 바랍니다.
꽃이 되어 내게로 오신 당신을 한없이 감사하며
산에 눈이 쌓여 산을 넘을 수 없다는
산남의 친구들은 빈자리로 놔두고
산북의 친구들 여기 눈을 밟고 와서
꽃이 되어, 가끔은 눈물이 되어
눈꽃 피는 마을 어둠 속에 자그마한 촛불을 켜고
우리들 어렸을 때 살던
실직하여 아무 욕심 없이 살던
철모르는 아이들과 창밖을 보며
눈 위에 누워서 아이들에게 옛이야기 들려주던
그런 시간들을 회상하기도 하였습니다.
당신이 내게로 와서 꽃이 되었으니
내 한없이 기쁨과 감격의 눈물 흘릴 수 있지만
너무 부끄러워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당신은 분명 우리들 아름다운 시절의 동반자입니다.
반드시 이별의 시간은 또 올 겁니다.
세월이 흘러 당신이 없는 빈자리에
오늘처럼 첫눈이 내리면,
나는 당신의 그림자를 밟으며 꽃이 되어
타다 남은 눈물, 연민이겠지만
버릴 수 없었던 것들을
당신에게 드리고 싶습니다.
내가 꽃이 되어
당신의 작은 가슴에 안겨 드리겠습니다.
♧ 채송화 친구
-나기철에게
채송화 친구는
달맞이꽃처럼
시를 가슴에 별처럼 달고
가슴으로 시를 쓴다
거리를 배회하며
혼자 즐기다 싱거워지면
전화 한 통화로
시처럼 말없음표 남기고
완성한 시어 하나와
동문시장 순대를
도시락처럼 싸고 다니면서
도서관에서, 거리에서 만난 소녀나,
시를 사랑하는 여자와
나누던 노래 한 꼭지를
내게 던지고 간다
쓸쓸함은 내게서 익는다
♧ 바람과 물결에 관한 명상 2
바람이나 슬픔 같은 것을
액자 속에 담으려 할 때
바람은 새어나와 피리를 불고
슬픔은 토란잎 위에
방울방울 이슬 되어 떨어진다.
밤은 그림자를 지우고
그 위에 다시 그리는 어둠의
붓 끝에 맺힌 하얀 빛
획을 긋지 못하고 있다.
삼백육십 굽이의 매듭을 풀고 또 풀어
반백년의 실타래를 풀어
바람이나 슬픔 같은 것들로
색을 바른 이야기의 액자 속에는
뼈와 뼈를 깁고,
살과 살이 만나는
귀신들의 이야기가 있다.
♧ 거룩한 하루
저녁에 술을 먹고,
새벽에 시를 쓰고,
아홉 시에 출근하여
열두 시에 밥을 먹고
여섯 시에 퇴근하면,
저녁에 술을 먹지 않으면 이상하다.
새벽에 시를 쓰지 않으면 이상하다.
아홉 시에 출근하지 않으면 이상하다.
열두 시에 밥을 먹지 않으면 이상하다.
♧ 예전처럼 살고 싶다
예전처럼 당신을 만나,
예전처럼 살고 싶어.
예전처럼 내 곁에 당신이 있고
예전처럼 난 당신의 포로가 되어
예전처럼 사랑은 달맞이꽃으로 피고
예전처럼 당신의 사랑, 그 아름다운 반란이,
예전처럼 나를 뒤흔들 때마다 감성의 촉수에 바람 일어,
예전처럼 마음 따뜻한 당신이 모든 위선을 벗어버린 그 술집.
예전처럼 아름다운 겨울 밤, 낭만의 그늘에 모여,
예전처럼 풍류가객은 황홀한 즉흥시를 읊고,
예전처럼 언제나 사랑 노래 꿈속인 듯 들으며,
예전처럼 당신과 살고 싶다.
♧ 번지 없는 주막
난 그냥 머물 곳 없어 헤매던 바람이었소.
잠시 머물던 세상 끝에 흔적을 남기고
번지 없는 주막에서 당신과 나누었던 사랑을
낙서하고 가는 쓸쓸한 바람이라오.
대책 없이 순진한 쌍년이 흘리던 눈물,
절망과 꿈을 넘나들며, 당신 곁에 맴돌고,
바람 같은 사내가 한 다발의 웃음으로 남긴
번지 없는 주막 벽면의 낙서장에는
당신이 가슴으로 쓴 연서 두 줄 서글프고.
당신, 마음이 따뜻한 여자,
난, 당신이 미치게 그리워 머물다 가는 바람이라고
낙서는 쓸쓸히 펄럭이고, 삐딱하게 항변하고,
번지 없는 주막에는 오늘도
살 냄새 그리워 찾아드는 외로움과
지울 수 없는 사랑을 낙서하며,
기억을 지워도 다시 돋아나는 그리움을 몸부림치며
번지 없는 주막의 슬픔 보다 더 진한 사랑 때문에
난 바람처럼 떠나버린 그대 빈자리를 지키는
당신의 그림자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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