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다시올 문학’ 겨울호의 시

김창집 2014. 1. 9. 00:11

 

다시올 문학 2013년 겨울호가 나왔다.

대단한 분량의 ‘특집탐구’는

‘윤동주 시인을 기억하며’

자그만치 우리나라와 일본 작가

21명의 원고를 실었다.

 

연재시는 이영식의 ‘우주적 협박’

인물시는 이인평의 ‘거장의 부활’

신작시는 무려 42분의 시를 올렸다.

 

그밖에도 김진길의 신작시조,

설미현 황인용의 연재수필

이태호 정순영의 신작산문

이재민의 연재소설

신인 수상작품으로 유희봉의 소설을 실었다.

 

그 중에 시 몇 편과

요즘 한창 익어가는

식나무 열매를 같이 올린다.  

 

 

♧ 우주적 협박 - 이영식

 

  지구가 초고속으로 태양을 돌고 있는데도

  내가 지구에서 떨어져나가지 않는 것은 너의 가슴에 나를 끌어주는 만류의 힘이 다스려왔기 때문이지. 네 사랑의 힘이 아니면 나는 한 순간에 우주의 미아가 되고 말 거야.

 

  지구가 고속으로 자전하고 있는데도

  내가 어지럽지 않은 것은 너의 그림자가 내 곁에서 함께 지구를 돌아주고 있기 때문이지. 너의 그늘이 아니면 나는 매일 취해 뱅뱅 돌다가 빈 소주병처럼 굴러다니다 깨지고 말 거야.

 

  니, 이래도 간다 할래? 

 

 

♧ 꽃을 든 남자 - 김수열

 

  키 낮은 집에서 어머니와 나란히 앉아 텔레비전을 보는데, 어머니 닮은 어머니가 쉰을 훌쩍 넘긴 아들 닮은 아들에게 한 말씀 하신다.

 

  언제부턴가 너그 아부진 집 밖으로 나갔다 하면 동네방네 다니믄서 꽃이란 꽃은 죄다 꺾어 한 아름 안고 돌아와 마당 가득 널어놓았니라 마당이 꽃천지였당게 남새시럽기도 허고 동네 미안헌 것도 한두 번이지 그때 생각으룬, 이그 저 냥반 왜 죽지두 않고 저 지랄인가 했는데 막상 옆에 없으니께 맴이 시리네 길 가다가두 꽃을 든 남자만 보믄 너그 아부지가 살아 돌아왔나 하고 한 번 더 보게 되더랑께

 

  먼 길 가신 아버지 생각이 나선지 어머니는 말없이 채널을 돌리신다

 

 

♧ 열매는 왜 둥근가 - 공광규

 

능곡 매화나무 가로수 아래

잘 익어서 떨어진 노란 매실들

매실을 밟으려다가 열매는 왜 둥근가를 생각했네

 

새잎부터 가뭄과 장마를 잘 견뎌

타 죽거나 떠내려가지 않고

꽃이었을 때 비바람에 잘 견뎠다는 점수겠네

 

노란 색연필로 동그라미를 꽉 채운 색깔과 향기는

오래 견딘 열매에게 주는

참 잘했다는 하늘의 칭찬이겠네

 

잘 익은 매실을 바라보다가

세상의 모욕을 잘 견뎌 둥그러진 사람 하나를

열매는 왜 둥근가를 오랫동안 생각했네 

 

 

♧ 나 - 김기산

 

하루하루 나는 나를 써가고 있다

한번 짚은 발자국 지우지 못하는 작품

연습은 없다

 

이미 책갈피마다 주름골 깊고

채색에 매달린 시간들 곳곳이 얼룩져 있다

비워지지 않아 놓쳤던 순간들이

헛일에 중독이었음을 아슬아슬하게 이르고 있다

 

정리의 길이라며 자꾸만 뒤 돌아보는 것은

또 다른 욕심에 빠져있는 것일까

어느 화려한 주인공을 바라보는

또 다른 집착은 아닐까

 

나날이 성글어가는 지도 속으로

나는 내 삶의 2부 목차를 지고 또 하루를 간다

페이지마다 나를 보고 있는 눈

느슨한 발자국마다 두려운 소리가 들리는 것은

나는 ‘나’ 의 저자일 수밖에 없는 까닭일까 

 

 

♧ 몸의 기상도氣象圖 - 김성수

 

내 관절의 사상(思想)은 류머티즘이다 고집스레 걸음을 조여서

뻑뻑해졌다 늘 저리게 흐린 구름의 동태를 파악 한다 등고선이

깊을수록 거북등으로 갈라진 통증은 여진(餘震)을 타전 한다

가끔은 국지성 호우로 무너진 제방에 급하게 파스를 붙인다 내

뒤에서 어머니는 늘 급하게 빨래를 걷는다 마음 귀퉁이에 불을

피우자 건조해진 나는 전부가 달아오르며 타버릴 때가 많았고

날씨는 변덕을 부렸다 하여 내 몸의 기상을 받아 적는 것은

어머니의 몫이다 집안은 구름으로 채워졌고, 먹구름으로 어머니와

마주앉은 날에는 뇌성벽력으로 집안이 파래졌다

류머티즘 골수분자인 내가 너덜거리는 기상도를 소각하기로 했다

굳었던 나무 등걸에서 잎이 불쑥 악수하자 손 내민다

집안 구름이 날아간다 내 사상이 유머티즘으로 웃을 수 없겠지만

유들유들 빗방울을 튕기며 통증을 어루만질 것이다

어머니가 빨래를 널고 있다 빛이 참 좋다

지팡이를 짚고 그 풍경으로 들어간다

 

 

♧ 흙의 사리 2 - 고영섭

 

깊고 깊은

산속의 명당 속에서

웅크리고 가부좌 튼 지난 몇 백 년

 

눈 밝은

도공의 눈에 띄어서

물레 위 맨살로 대처지다가

 

천삼백 도

가마의 열기 속에서

태울 것 다 태우고 오롯이 남은

 

고령토의

정골사리 조선 막사발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고 나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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