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우리詩 1월호의 시와 수선화

김창집 2014. 1. 4. 00:55

  

  <우리詩> 1월호가 나왔다. 통권 제307호로 ‘우리詩 칼럼’은 임보 시인이, ‘신작詩 10인 選’은 홍해리 김만수 박원혜 도경희 김숙희 정연홍 심은섭 박승류 신단향 조희진의 시 각 2편씩을, ‘詩誌 속 작은 시집’은 임미리의 시와 시작노트, 남대희의 시와 이재부의 해설을 실었다.

 

  ‘테마가 있는 소시집’은 김세형의 시와 시작 노트, ‘시 감상과 시집 해설’은 박승류의 ‘관계, 좁고도 넓은, 얕고도 깊은’, 이동훈의 ‘책과 밥에 대하여’, 홍예영의 ‘강물을 품은 나무가 서 있는 법’을, ‘한시한담’은 조영임의 ‘조선시대 육아일기를 남긴 목재 이문건’을, ‘양선규의 「인문학 스프」’는 ‘큰 것을 봐야’를 썼다. 시 몇 편을 골라 요즘 한창인 수선화와 같이 싣는다.

  

 

♧ 새해의 기도 - 이성선

 

새해엔 서두르지 않게 하소서

가장 맑은 눈동자로

당신 가슴에서 물을 긷게 하소서

기도하는 나무가 되어

새로운 몸짓의 새가 되어

높이 비상하며

영원을 노래하는 악기가 되게 하소서

새해엔, 아아

가장 고독한 길을 가게 하소서

당신이 별 사이로 흐르는

혜성으로 찬란히 뜨는 시간

나는 그 하늘 아래

아름다운 글을 쓰며

당신에게 바치는 시집을 준비하는

나날이게 하소서 

 

 

♧ 시 읽기 또는 시집 읽기 - 洪海里

 

무시로 날아오는 시집을 펴고

시를 읽다, 시집을 읽다

시는 보이지 않고 시집만 쌓여 간다

 

‘가슴 속이 보이는 온 몸을 품고

제 자리에 가로선체 뒤 꼼짝도 안고있다

가랭이 가까히 낭떨어지 꺼꾸로 날으는

눈꼽 달고 있는 눈섭의 놈팽이

갑짜기 갈려고 하는 데 담배 한 개피 물고

너무 막있는 것 같아요! 너무 아름다워 보여진다며

만난지 10 년된 불안 인것을 어찌하지 못하는

ㅇㅇㅇ 시인께,

저자 혜존’

 

오서낙자誤書落字와 잘못된 띄어쓰기만 주어먹다

마침내 시를 잃고 시집을 덮어버린다

시가 없는 시집을 나에게 시집보낸 것이다

시집올 수도 없는 아홉 살배기 소녀

나는 시를 사랑하는 신랑인 시랑詩郞이어서

어쩔 수 없이 시집을 펴고 한 겹 한 겹 옷을 벗긴다

날개옷 같은 시는 다 날아가버리고

텅 빈 시집柴集 속

껍데기만 남아 바들바들 떨고 있다. 

 

 

♧ 일출 - 도경희

 

섣달그믐 깊은 밤

어둠과 바람에 몸 절여가며

영혼 뒤흔드는 꿈은

꿈은 지금 어디까지 왔는가

월아산 질마재를 넘고 있는가

 

오! 칠흑 같은 삼동의 밤 다 들쳐 업고

서서히 빛으로 어둠 녹이면서

태양이 떠오른다

첫 마음에 불을 놓아 환호하는 천지 만물

황홀한 색채로 유순한 그림자 온전하게 놓는다

 

가파른 까끌막 새벽을 밀며 끌며 오는 사람들

솰솰 나부끼는 영험한 해님 불어올려

수런수런 잎사귀며 꽃잎을 빚기 시작한다

축복하는 손 마주잡아 흔들며

축원하는 숨결 뜨거운 존재들

 

한 걸음 두 걸음 봄쪽으로 가고 있다

  

 

♧ 해질녘 - 김숙희

 

꽃이 잎을 닫는다

조용히 자기 반성에 든다

하늘과 땅이 또 만나려

울음빛으로 붉어지는 하늘

그늘이 사라지고

서로를 이으려는 애 쓰던 시간들이

동아줄을 잡으려 발끈했던

화끈거린 얼굴이 붉어진다

심오하게 가지고 놀던 말들도 잠재우려 하고

노을빛 동공으로 투영할 때

부질없는 욕심 티끌을

말끔히 씻어 내리려 한다

가던 길을 조용히 쓸며

서서히 저물어가는 해질녘

중심을 잡아주는 컴에 오르면

긍정의 힘을 불어 넣어 주고

가뭇없던 희망의 삶의

사르르 가슴을 쓰다듬고

반짝임으로 여울지며

창밖은 조용히 어둑살 내리고 있다

또 하루를 위하여…… 

 

 

♧ 오어사吾魚寺 - 정연홍

 

사람은 본래 물고기였다

아가미가 닫히고, 허파가 생겨났다

손가락이, 팔이 돋아났다

 

신의 계시는 망각되고

거짓만 남았다

 

직립을 하자

하늘은 낮아졌고, 신과

동격이 되었다

 

잉어 한 마리 날아올랐다

스님은 물고기를 환생시켰다

 

연못 속에 지어진 집 한 채

천년을 견디고

물고기의 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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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어사 : 포항시 오천읍 운제산에 위치. 원효와 혜공의 설화가 있는 절. 

 

 

♧ 단단한 눈물 2 - 심은섭

 

1. 냄새

 

  삼베적삼을 교주로 삼은 젖비린내다 아니다 기쁨이 실종된 과즙의 향기이고, 가끔 분노가 타다 남은 설움이다 노동자의 살갗에 뙤약볕의 인두질로 생긴 몇 채의 물집이고, 원소주기율표에서 알몸으로 망명한 원소기호다

 

2. 모양

 

  실밥이 터져나간 푸른 영혼이고, 천지신령도 의심하지 않는 미확인비행물체이다 소주병이 제 몸을 비워가며 달래던 둥근 상처이고, 긴 발톱을 감춘 채 삭발하는 실개천이고, 밤새도록 절벽을 뛰어내리는 스턴트맨이다

 

3. 질량

 

  신이 사라진 신전에 박혀있는 황금덩어리이다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자정과 0시 사이의 틈이다 자판기로부터 탈출에 성공한 50원짜리 블랙커피 한 잔이다 골목을 몰려다니던 풍문이 구워낸 비극 한 접시이다

 

4. 무게

 

  잔속의 각설탕이 해탈하며 외던 한 권의 법문이고, 저음으로 울어야 하는 콘트라베이스 1번 선의 홧병 360㎖이다 낮달 아래에서 각혈하는 패랭이꽃의 정열 한 스푼과 사형장에서 들려오는 화색이 붉은 한 발의 총성이다  

 

 

♧ 감나무가 보이는 카페, 알바 모집 - 남대희

 

이태백이란 신조어가 나완 무관하리라는 생각은 착각이었어

알바공화국에도 봄은 왔는지

카페에는 비발디의 봄이 흐르고

까치가 앉았다 날아간 자리에

산수유꽃이 노란 왕관을 쓰고 찾아왔어

 

빈 감나무는 허기진 모습이야

걱정이 많은지

반듯하게 뻗은 가지초리 하나 없어

야윈 품에 옥탑방 같은 성긴 까치집

주름진 바람만 숭숭 지나다니고

매일 밤 언덕 아래로 굴러오는 불빛만은

커피처럼 따뜻했어

 

테이블보에 수놓인 하얀 나비가

호로롱 날아오르더니, 이력서 행간을 흘깃 훑고는

감나무밭을 지나 봄볕 속으로 사라졌어

투명한 창 넘어 들어온 감나무 그림자

따뜻한 커피 잔에 찬 손을 비비고 있었어

 

면접 결과는 주말쯤 알려 준다고 했어

    

 

♧ 그대 - 김세형

 

오늘 낮 ‘대對’ 미술관에 갔다

그곳서 쿠르베의 ‘세계의 근원’*을 보았다

보았지만 세계의 근원은 보지 못했다

그저 세계의 근원에 對해서만 보았을 뿐이다

근원이 아닌 對만 보았을 뿐이다

늘 밤마다 대하는 對, 그대…

오늘밤도 세계의 근원을 보기 위해

그대의 ‘對’ 미술관에 들어갔으나

그對만 보았을 뿐,

세계의 근원은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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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스타프 쿠르베 - 프랑스 사실주의 화가. 그가 그린 <세계의 기원>(1866년)은 여성의 성기가 섹스의 단순한 도구가 아닌 생산의 근원임을 주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