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필로그
무엇인가 핑계만 있으면
만나고 싶었다.
2009년 5월 6일.
제주여고 교장실 첫모임.
제주문협 활동을 함께 하던 시인들이었다.
‘운(韻)&율(律)’이란 소박한 모임이 시작되었다.
(중략)
이제 꽉 찼다. 열 사람!
그리고 「바퀴 위에 앉은 세상」이 태어났다.
어디로 굴러갈지? 넓은 바다로 풍덩 빠졌으면 좋겠다.
아! 시원하다!
이 시집에서 차례로 시 여섯 편을 골라
요즘 한창 씨앗을 폴폴 날리는
박주가리 열매와 같이 올린다.
♧ 참나무 - 고성기
겨울이 다가서면
참나무는 옷을 벗는다
인고의 세월, 문 걸어 잠그고 안으로 운다
광야를 더러는 설산을 향해 앞장한다.
굴참나무, 갈참나무, 졸참나무, 신갈나무, 상수리나무, 떡갈나무
방향과 무늬가 달라도 동안거의 화두는 ‘참’
정수리
탁, 치는 깨달음
도토리가 익었다.
♧ 가끔 나는 동치미가 되고 싶다 - 권재효
너와 동침을 꿈구던 날
왜 자꾸 동치미가 생각나던지
팔랑,
바람처럼 너는 가버리고
김칫국부터 마신 죄 하도 커서
나는 무밭으로 달려가
잎새 파란 무가 되었던 것인데
땅 속에 단단하게 박힌 놈이
이왕지사 너에게 뽑혀서
동치미 동치미로나 만들어져
네 입술을 적시고 살살살
혀를 녹이다가 시원하게
네 몸을 타고 내렸으면 하는
아, 지랄 같은 생각
♧ 귀향 2 - 문경훈
갈바람
담쟁이 속으로 숨어들어 탄다
감나무 휘어진 가지마다
빨갛게 감이 탄다
무너지다 만
싸리문
깨어진 장독대 너머
막 저녁 해가 떨어지고 있다
♧ 한라산 ․ 봄 - 송창선
눈 녹아 흐르는 물소리처럼
오솔길에 돌아가서
한라산 기슭에 발 젖는데
앙증맞은 잔설 새로 어린 빛살 모아
복수초 푸른 잎자리 위에
노란 꽃잎이 오롯이 영롱하다
설레고 두려운 날에
추위에 길러온 고된 꿈 하나
어둠 속에 간직해 온 푸름이
당돌하게 가슴 졸이는
봄 ․ 산
♧ 여행 2 - 안상근
낯선 세상은 늘 설렘으로 옵니다
알지 못한다는 것은 늘 끌림으로 다가옵니다
호기심은 짜릿함 그 자체입니다
체험은 살 떨리는 즐거움입니다
거기에는 새로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 산책 2 - 양민숙
-오솔길이 말하다
가을 이끼가 한 꺼풀 덧씌워진 오솔길
켜켜이 쌓이는 이끼 더께 위로 흐르는
포장된 욕망의 흔적들
듬성듬성 하늘을 가린 솔가지 사이를 뚫고
빗금 치며 스며드는 햇살을 걷어내면
걸을 때마다 전해오는 저 축축한
시간에 삭힌 잔해들
모른 채 흘러가는
립스틱과 매니큐어의 색깔
넥타이와 구두의 디자인
에쿠스와 마티즈의 주인
침묵으로 삼키는
벌거벗고 돌아오는
이제, 누구보다도 희망하는
오솔길을 말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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