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밝은 지도 어느덧 한 달
오늘은 음력설 하루 전 그믐날이다.
며칠 날씨가 풀리더니
동네 텃밭에 이렇게 완두콩 꽃이 한창이다.
그래저래 입춘이 가까워서인지
옆에는 쇠별꽃, 벌노랑이, 살갈퀴도 피었다.
내일은 설날
일제 때 민족문화말살정책으로
양력설을 쇠도록 했다가
다시 음력으로 돌린 지도 꽤 시간이 지났다.
그런데 요즘 일본이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오키나와도 통째로 먹고,
그렇게 수많은 섬을 가진 것도 모자라서
아이들에게 거짓 교육을 시키면서까지
야욕을 드러내고 있다.
♧ 섣달 그믐날 저녁에 생각나는 것은 - 박종영
매년 이맘때 섣달 그믐날 저녁이면
아버지는 가마솥에 물을 데어
우리 삼형제를 목욕시키고
물 부른 손톱과 발톱을 녹슨 가위로
물려받은 가난을 잘라내기 시작했다.
한 해를 보내면서 정갈하게 씻고 닦아
보내는 시간과 다시 맞는 새해를
마음 가다듬고 소원 성취하라고
배불리 먹는 덕담까지 아끼지 않았다.
그때마다 안경 너머로 비치는
아버지의 세월은 눈가에 잔주름을 늘어만 가게 했고
한복 저고리 떼 묻은 동전 깃에서는
서러운 옛날 얘기가 묻어나고 있었다.
어머니는 별것 차림세도 없이
비좁은 부엌에서 분주하게 손놀림하며,
지난봄 그 안개 서린 들녘에서 낭만을 외우며 갓 뜯어와
봄볕에 말린 취나물과 고사리나물을 데쳐 찬물에 얼리고,
옛날로 달려가는 바닷가가 그리운지 가슴이 하얗다.
초하루인 내일쯤에는
우리 가족 모두는 아버지의 가르침대로
계곡물이 흐르고 따박솔이 촘촘히 자라선
하마터면 명당자리라고 불리는 운봉산 허리 자락,
나지막한 능선 따라 할아버지 할머니의 묘소에서
희망을 안고 성묘 차례를 지낸다.
기다려지는 이 그믐밤에
생각나는 풋풋한 이야기는 아무래도
붉게 타오르는 설날 아침에 들었으면 좋겠다.
♧ 섣달그믐 - 하영순
높디높은 산마루
나직이 내려 깔린 구름위에 발 얹으니
구름은 돌아보지 말라하며
사바를 덮어 주네
듣지도 보지도 말아야 하는데
늑골 밑에 숨어있던
흑백 필름이 등줄 타고 머리에 앉아
망상을 후비네
바람을 탔는지 화살을 탔는지
나뭇가지에 걸린
끈 떨어진 연이 멀미를 하네
어디서 왔는며 또 어디로 갈 건지
바람 소리 요란 한 길
나침반이 없어
돌아 갈 수 없네!
♧ 섣달그믐 - 권옥희
앞선 아비의 등 뒤론 바다보다 더 깊은 어둠이 흐르고
속 끓이는 불덩이처럼 나는 종내 그 어둠 속에 혼을 놓고
말았다. 보이냐, 보이느냐며 애써 고향을 묻으며 손길 한
번 다가가지 못한 유년의 골짝마다 그리움만 무수히 별로
뜨는데 어둠은 어김없이 내 등을 일으켜 뭉텅뭉텅 잘려나
간 기억을 이어대다가 밤이슬로 부쉈다가 처음부터 내 혼
은 없었던 것 같아 누구도 부르지 못한 섬. 낯 익은 길을
열어도 하늘은 달마저 감춘 다 털어낸 벼포기의 밑동 같은
그믐밤을 내려놓았다.
섣달 어둠에 매달린 이리도 질긴 뿌리 어이 잘라낼거나.
아직도 바람같이 내달르고 있는 아득한 세월 너머 넉넉했
던 아비의 등짝 이미 간 곳 없고 넉살 좋은 심장처럼 굳은
가래떡을 썰며 나는 떡국 한 그릇도 목이 메어 넘길 수가
없는데 또 얼마나 많은 그리움들이 이 깜깜함 속에 가슴을
치고 있을지 보이냐, 보이느냐며 애써 몸을 일으키며 어둠
보다 더 깊은 해가 흘러간다.
♧ 섣달그믐 - 장진숙
날 저문 귀향길엔 폐가를 뒤지다 온 찬바람 홀로 울며 내닫고
알곡의 싸락별들 누가 죄다 실어냈는지
샛별 하나 뜨지 않았다
가는 해 걸직히 엮어 복조리에 너스레 담아 돌리던 총각
깜부기로 타서 떠났다 하고
들몰댁 사십 년 정한수 사발
귀밑머리 허옇게 얼어 고샅을 지키는데
너덜컹 푸서리 누가 갈아엎느냐고
오는 해 싱싱한 꿈 누가 건지느냐고
어머니 한숨엔 숭숭 바람이들어
생솔 매운 연기에 짓무른 눈 연신 벌개지는데
좀처럼 시루떡은 익지 않았다
♧ 섣달그믐 날 - 서혜미
호롱불 아래
명주바지 저고리 밤새워 꿰매시고
숯불 다리미로 시간을 다린다
섣달 그믐날 잠자면
눈썹이 센다고
어린 딸에게 말하지만
철모르는 딸 그만 꿈속으로 빠진다
색동저고리에 코고무신 신고
하늘을 나는 어린 딸,
방긋 방긋 웃는다
윗목에 앉아 가래떡 썰고 있는
어머니 기침소리
문고리에 쩍쩍 달라붙어
쇳소리 내고 있다
♧ 마음속으로 먼저 오는 봄 - 김영천
안개 짙은 날 아침이면
산, 언덕 곳곳마다
핏빛 꽃 무더기로 피워놓곤 하더니만
섣달도 그믐께쯤으론 제 품안으로
시린 바람만 한 자락 부려 놓았구나.
마음이야
버얼써 꼽발을 딛고
머언 발치로 서둘러 내닫는 것이지만
아서라, 아직은 여린 그리움 하나를
땅 밑 깊숙이 감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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