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디카 일기

현호색 피어 있는 숲길

김창집 2014. 3. 23. 00:13

  

모처럼 맞는 화창한 봄날

민오름과 지그리오름에서 우리는

현란한 봄꽃들과 마주 할 수 있었다.

 

햇볕을 받으면서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노루귀,

하늘에 별만큼이나 많아 보였다.

 

큰지그리오름 정상,

마른 풀잎 사이에서 왁자지껄 그 모습을

드러내던 산자고들.

 

그리고 좀 늦었지만

줄기와 잎사귀 위에

무더기 무더기 노랗게 피어난 복수초들….

 

그리고 나서 민오름 골짜기에서

만난 것은 이 현호색이었다.

 

 

♧ 현호색에게 - 김승기

 

청순가련의 미혹에 이끌린

눈먼 사랑으로

실패했던 봄,

옹이 굵어가는 마디마다

눈물이 흐른다

 

더는 색에 현혹되지 말자

다짐했는데,

꽃 지고 잎만 무성한 여름 보내고 나니

불붙는 단풍에

또 마음 흔들린다

 

어설픈 사랑 통하지 않는 세상

낙엽 지고 눈 내려 얼어붙고 나면

가슴 치고

통곡할 줄 알면서

왜 이렇게 무너지는지 몰라

 

다시 봄 오면

그렇게 꽃 피는 미친 사랑

할 수 있을까,

그래도 한바탕 잘 펼친 놀이판이라 여기면 되는데

왜 자꾸 응어리만 맺히는지 몰라 

 

 

♧ 현호색 - 박얼서

 

이제 방금 둥지를 뛰쳐나온

당신의 체온을 감싸 안는다.

 

겨우내 바닥난 인내를 움켜쥐면서도

찬바람마저도 골라 줍던 당신

일어서는 욕심 다독거리며

죄다 떨쳐낸 옹골찬 의기 앞에

쉼 없이 걸러진 동맥을 가로질러

우주를 잇는 푸르른 역동

 

심장을 때리는 맥박 수에 맞춰

희망 찬 날갯짓 웅비하려는 보라매

당신 이름이 뭐였더라

이름도 보라 날개옷도 보라 잘 기억해두라며

‘현호색’이라고 말했었지

 

떨리는 손에 옷자락 끌어 잡고

입맞춤 뜨겁게 포옹하던 날

먼 노랫소리 고요한 아침이다.

 

 

♧ 꽃들에게 - 한도훈

 

  천지가 다 꽃이지요. 꽃이 아닌 것들은 다 귀양을 갔어요. 가시덤불로 위리안치 되었어요. 밤바다에 파도꽃이 피지만 어지럽네요. 어라? 꽃들이 봄바람에 흩날려 얼굴에 떨어지고 있어요. 꽃비! 꽃비 속에 다들 행복이 들어있다고 하지요. 하지만 시방 꽃비엔 독이 있어요. 허무에의 중독! 가끔은 꿈속에서 삶에 멍들어 붉은 비탈길을 만나지요. 바위만 앙상한 깎아지른 절벽에 얼굴을 걸치고 누워있지요. 꽃향기에 허기가 져서 꽃의 얼굴이 희미하게 떠올라요. 제비꽃인지, 앵초꽃인지…. 아니면 현호색인지...도통 분간을 할 수 없는 꽃. 꽃은 향기만 남고 사라져요. 아아, 그런데, 그 향기도 찰나이지요. 온몸으로 느낀다고 여긴 그 순간, 향기는 사라져 버리고 마음엔 자갈밭만 남아요. 내게서 떠난 향기가 빈 허공을 가득 채워요. 향기가 병균처럼 줄줄이 새끼를 치나 봐요. 향기로 수놓아진 허공이 생겨나요. 이제 달빛이 꽃이고, 폭죽도 꽃이지요. 한줄금 내리는 빛줄기에 빗금이 그어지는 마당도 꽃이랍니다. 꽃 속에 숨어 있는 얼굴! 얼굴 속에 숨어 있는 꽃! 꽃은 항상 향기의 얼굴로 피어나지요. 모진 칼바람에 모가지가 꺾인 채로….  

 

 

 

♧ 수종사에 가야 한다 - 청하 권대욱

 

낯선 계절 하나 찾아오는 날

산과 강바람 하나 더, 옛사람이 그리우면

먼저 와 있을, 봄 찾아 수종사에 가야 한다

바이올렛 진분홍으로 피어날 약사전 앞

두 손에 담은 살가운 소망은

먼빛 매지 구름에 얹고

영혼의 그림자 산길 돌계단에 내려놓으면

수채화 닮은 현호색이

느긋하게 자리한 삼정헌

분청찻잔에 보고 싶은 사람 얼굴이 보일 것이다

여태 남은 산수유 화사한 미소 따라

노랑나비 헤픈 날갯짓이 지나는

오층탑 돌난간 솔바람 머문

흙담 길 그늘 열아홉 폭 처녀치마

핼쑥한 얼굴에도

사월은 더 깊어질 것이기에

봄 하나 더 찾으려면 숨길 조금 가파도

물빛 좋은 두물머리 지나 수종사에 가야 한다.  

 

 

♧ 변주곡 - 김종제

 

나무 높은 곳에

저를 우러러 보라고 핀

해마다 그 꽃 보다가

비바람 몰아친 어제 마당을

빗자루 들고 청소하는데

땅 가까이 몸 굽히며 핀

보라빛 현호색 보았다

배를 깔고 그냥 엎드려 피었다

누워서 그냥 잠든 채로 피었다

저 꽃 같은 삶이야말로

이름도 없이 야사처럼 살다간

저 아랫 동네 이웃들이다

머리에 쓸 관도

반짝이는 옷도 없이

옷 한 벌로 즉흥처럼 살다간

민초들의 삶이다

거추장스러운 틀을

한 번쯤 확 뒤집어 버리려고

함성처럼 깃발처럼 일어난

저 꽃이 변주곡이다

허공에 붕 떠 있지 않고

흙에 발을 딛고 사는 삶이라

내일이나 모레에 다시 필지 말지

앞날을 모르는 생이다

뿌리도 깊게 내리지 않았지만

바람에 쉽게 꺾이지 않고

세상 꽉 붙들어 매어놓은 꽃이다 

 

 

♧ 봄꽃을 보니 - 김시천

 

봄꽃을 보니

그리운 사람 더욱 그립습니다

 

이 봄엔 나도

내 마음 무거운 빗장을 풀고

봄꽃처럼 그리운 가슴 맑게 씻어서

사랑하는 사람 앞에 서고 싶습니다

조금은 수줍은 듯 어색한 미소도

보여주고 싶습니다

 

그렇게 평생을

피었다 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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