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우리詩’ 6월호와 다래꽃

김창집 2014. 6. 9. 01:57

 

어제 제주어보전회 식구들과

한대오름엘 가는데

숲속에서 이 다래꽃을 만났다.

 

배꽃을 닮으면서도

검은 꽃술을 매달고 있는 것이

보면 볼수록 매력적이다.

 

여름날 숲속에

다소곳이 고개 숙여 피어난 다래꽃과

‘우리詩’ 6월호의 시를 같이 내보낸다. 

 

 

♧ 분홍을 놓치다 - 박홍

 

  개망초 꽃봉오리에 남아 있는 粉紅을 보셨는지요 예비군 사내들이 땀내 푹푹 풍기면서 포복하고 있는 훈련장 둔치에 우우 몰려드는 꽃들 사이에 숨어 있는 粉紅 꽃망울들을 보셨는지요 똑같이 흰색으로 피어나기 싫은 듯 사라지는 粉紅의 끝자락을 붙들고 있는 안간힘을 보셨는지요 촌스런 순정이지요 가장자리로만 살짝 남은 집착이지요 흰색으로 만개하는 개망초꽃의 한살이가 싫은 거지요 그러는 사이에도 粉紅은 시나브로 빠져 나가고 있어요 꿈이 떠나고 남은 흔적처럼 누렇게 바래는 흰색이 싫어서 기를 쓰고 매달리는 거지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삶의 한 순간을 붙들고 있는 안타까움이겠죠 粉紅은 슬프네요 다른 생을 찾아 헤맨 일탈의 흔적 같네요

  예비군 훈련장 둔치에서 개망초꽃들이 하얗게 제식훈련을 받고 있어요   

 

 

♧ 문지방 - 김금용

 

백로야, 너는 어디로 날아가니

나는 강가에 살고

너는 강을 넘나들며 사는데

우린 통성명이 없구나

도시를 등지기는 마찬가지인데

넌 제 문지방을 넘지 않는구나

서로 학명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지만

나도 흰 빛과 날개를 흠모하는데

너는 내 기척에

도도하게 날개를 펴고 날아갈 뿐

 

그래, 너는 문 너머에 살아라

나는 문 안에서 지내는 데 익숙하니

강가를 기웃거린 내가 잘못이다 

 

 

♧ 봄날은 간다 - 안도현

 

늙은 도둑놈처럼 시커멓게 생긴

보리밭가에서 떠나지 않고 서 있는 살구나무에

꽃잎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자고 나면 살구나무 가지마다 다닥다닥

누가 꽃잎을 갖다 붙이는 것 같았다

 

그렇게 쓸데없는 일을 하는 그가 누구인지

꽃잎을 자꾸자꾸 이어붙여 어쩌겠다는 것인지

나는 매일 살구나무 가까이 다가갔으나

꽃잎과 꽃잎 사이 아무도 모르게

봄날이 가고 있었다

나는 흐드득 지는 살구꽃을 손으로 받아들다가

또 입으로 받아먹다가 집으로 돌아가곤 하였는데

 

어느 날 들판 한가운데

살구나무에다 돛을 만들어 달고 떠나려는

한 척의 커다란 범선(帆船)을 보았다

살구꽃을 피우던 그가 거기 타고 있을 것 같았다

멀리까지 보리밭이 파도로 넘실거리고 있었다

 

어서 가서 저 배를 밀어주어야 하나

저 배 위에 나도 훌쩍 몸을 실어야 하나

살구꽃이 땅에 흰 보자기를 다 펼쳐놓을 때까지

나는 떠나가는 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슘 - 임보

 

태평양의 심해에 살던 신묘한 고동 하나가 내게 찾아왔다.

 

그 놈의 이름이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 그의 고향 가까이 사는 열대의

원주민들은 그를 어떻게 부르는지, 어류 학자들이 붙인 학명이 무엇

인지도 물론 알 수 없다. 아니 그들이 어떻게 부르든 나는 상관 않고

그놈에게 이름을 하나 달기로 한다. 호(號)라고 해도 무방하다.

조선조의 한 묵객은 이백 몇 십 개의 자호를 즐겼거늘 내 그놈에게

호 하나 주기로서니 크게 건방질 것도 없다. ‘슘’이라고 명한다.

무슨 의미냐고?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놈의 형상과 빛깔과 감촉과……

이러한 것들이 내 심상 속에 섬광처럼 돋아난 소리다. 문자다.

 

도자기보다 더 반짝이며 화사한 뿔고동

보석보다 더 무겁고 단단한 패각(貝殼)

수국의 요정들이 가지고 노는 주사위인가?

어승(魚僧)의 사리가 담긴 사리함 같기도 하다

물이 불을 이긴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물이 빚어낸 저 화신(化身)이 불이 구워낸 자기보다 눈부시다

아 답답도 해라 내 어눌한 혀로 그를 형용할 수 없음이,

차라리 빛의 힘을 빌어 한 컷 붙잡아 보이는 수밖에

 

슘 슘 슘

아마도 수궁의 밀서가 그 속에 담겼나 보다

내 아직 그를 열어 읽을 수 없으니

뭍[陸]과 물[海]의 수교가 또 그만큼 늦어지는 수밖에……. 

 

 

♧ 궁합 - 홍해리

  -치매행致梅行 ․ 9

 

위에서 물을 끌어올리는

마중물

 

아래서 불을 붙이는

밑불

 

물과 불은

상극相剋이라지만

 

부부란 씨실과 날실이 되어

삶의 무늬를 엮는

 

사랑이란 이름의

깊은 품

 

해도 들고

달도 드는 

 

 

♧ 호접란 - 성숙옥

 

나뭇가지를 흔드는 바람 아궁이에

햇살 장작을 넣으면

연둣빛 구름이 피어오를 것만 같은 정오

 

난에 파묻힌 트럭이

주변의 고요를 흔들고 있다

가녀린 꽃대에 앉은

보랏빛 날개가 설렘으로 나풀거리는지

교차로를 지나는 차들까지

비상등을 켜고

가로수의 벚꽃도 발벗고 뛰어내린다

 

무채색의 허공을 찢으며

색을 바르는 시간

물길을 끌어올리는 꽃대로

말라 있던 길이 촉촉해지는 봄

 

보도블록 위

옹기종기 모여 앉은 저 나비,

곧 날아오를 것만 같다  

 

 

♧ 의자 7 - 권기만

 

사과나무에 누가 의자를 걸어 놓았나

 

사방 다 보이는 자세로 앉아 보는 응시자

 

고요의 극점에 둥글게 몸 들여 놓고 있다

 

앉아 보지 않고는 의자인 걸 모르는 의자

 

하필 열매로 앉혀 두려는 생각은 누가 했을까

 

사방을 한꺼번에 다 봐야 익는 숨결이 붉어질 때

 

햇살과 바람이 사이 좋게 앉아 있다

 

천둥과 무지개가 어깨동무로 앉아 있다

 

구름을 끌어다 무릎을 덮고 있다

 

사과를 치우자

 

의자는 어디로 갔는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