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디카 일기

소엽달개비 초여름에

김창집 2014. 6. 21. 07:28

 

 

장마전선이 오르내리는데도 비가 내리지 않은 아침,

오늘 오후 동백동산 숲에서 강의를 해야 하는데

조금 걱정이 된다.

 

동백동산 숲은 보통 숲과 달리

국내 최대 상록활엽수 천연림이기 때문에

비가 오면 칙칙하고 어둡다.

 

그리고 이곳의 일부 지역은

람사르 습지로 등록되어 있어

많은 종류의 동식물군과 보호종들이 서식한다.

 

월드컵 바람으로 잠을 설친 아침,

초여름날의 후덥한 공기가 벌써 주변을 맴돈다.

 

 

 

♧ 초여름 바람 - 박인걸

 

지난겨울 나목 위를 걸으며

예리한 칼날을

사정없이 휘두를 때

나무들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어디를 쏘다니며 행패를 부리다

느닷없이 나타나

살랑거리며 햇순에 앉아

모의를 획책하는가.

 

눈을 맞으며 전깃줄에 앉아

천년유혼처럼 울며

긴긴밤 다하도록

저주를 퍼붓던 네가

 

천사의 옷을 입고

밝은 햇살과 함께 꽃잎에 앉았어도

나는 너를 향한

경계의 눈빛을 거둘 수 없다.  

 

 

♧ 초여름 일기 - 이정원

 

  한낮은 뭉근하다. 푸른 잎사귀들이 더위에 제 몸을 내어 주고 달아오르는 동안 아이와 팔베개하고 드러누워 클클 대며 만화책을 읽었다. 사그락 사그락 마르는 빨래, 바람이 휘저으며 노는 소리, 쓰레기통은 한참 부화중일 테지. 살충제를 들고 일어나는 순간 아이의 잠이 툭 떨어진다. 어느새 아이는 어미의 옷자락을 붙잡고 우듬지 속을 헤매고 있었던 것인가. 몸이 뿌리로 박혀 꽃으로 환생할 어디쯤 곤충의 애벌레같이 부화를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 아이의 잠을 베게에 올린다. 아이는 놓쳐버린 꿈을 움켜쥐려 한번을 더 뒤척이고, 땅속의 모든 벌레들이 돌아눕는 소리, 땅의 껍질을 깨고 튀어 오른다. 쓰레기통은 닫혀 있다. 마른 잎이 물을 끌어당길 동안 빨래집게에 꽂힌 햇빛 한줌 마악 잎사귀에 내려앉을 판이다. 주룩주룩 설거지물 하수구에 쏟아져 내린다. 아이의 덜 닫힌 잠의 창으로 한 줄기 소낙비 시원스레 퍼붓는다. 뭉근해진 한낮이 조리개 속으로 풀어진다. 풋여름이다.  

 

 

♧ 초여름 - 반기룡

 

푸른 제복 입은

계엄군처럼 몰려오는 듯 하다

 

신록이 우거진 계곡마다

새소리 요란하고

전신주 피뢰침은

천둥번개 받아들일 준비로

여념이 없다

 

연둣빛 사연 우체통마다

그득하게 쌓이고

하늘은

먹장구름처럼 찌푸린 채

빗방울 후드득 떨어질 듯 분주하다

 

구슬땀이 또르르 구르고

아랫도리가 하마 흥건하다  

 

 

 

♧ 초여름 풍경 - 김재혁

 

날이 덥다

보이지 않는 새들이 나무 위에서 지저귄다

새들의 울음소리에 나뭇잎이들이 시든다

더운 날 나무에게는 잦은 새 소리가

불안처럼 느껴진다

익어가는 토마토마다 빨갛게 독기가 차 오르고

철길을 기어가는 전철의 터진 내장에서

질질질 질긴 기름이 떨어진다

약속에 늦은 한낮이

헐레벌떡 달려온 아파트 화단엔

기다리는 풀 풀벌레도 없다

아이의 손에 들린 풍선이 터진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서

고무 타는 냄새가 난다  

 

 

♧ 초여름 밤의 비가 - 이복란

 

개구리 자지러질 듯

밤꽃 향내음 물씬한 교성

하,

부끄러워

가슴속으로 파고드는 그리움

 

그리움 총총히 박힌

하늘 자락에 걸어놓은 시계가

깜빡 졸다 떨어진

침상에는

설운 초여름 밤이 드러눕는다.

 

눅룩한 어둠을 가로질러

밤꽃 꺾어 내게올

그 길에

촛불 하나 켜 놓았었는데

 

뽀얀 안개 쓱 문지르고

성큼 들어서는 아침,

햇살이

참 눈부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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