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디카 일기

양전형의 시와 숲 풍경

김창집 2014. 7. 20. 07:50

 

모처럼 오름 강좌가 없는 토요일

한라산 둘레길을 걷는 오름 4기 팀과 같이

둘레길 2코스를 걸어 붉은오름을 다녀왔다.

 

아무런 부담감 없이

장마 속 싱그런 풀숲을 걷노라니

얘기하느라 평소 못 듣던

새소리까지 구별할 수 있었다.

 

초복이 지난 숲은

이제 푸를 대로 푸르렀고

비가 내려 곳곳에 물이 고여

경관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곳곳에서 휴식할 때

알맞게 준비한 과일과

한 잔의 막걸리는

더 이상 부러워할 것이 없게 한다.

 

가끔은 이렇게

세상의 모든 짐을 훌훌 털어버리고

어깨 가벼이 숲을 탐해 즐긴다. 

 

 

♧ 세상이 나를 보고 있네

     --목장길에서

 

늦은 오후가 목장길을 걸어간다

지루한 하루를 다 들이마신 종이컵 하나

바람을 굴리며 길섶으로 들어선다

그랬었지 내 젊음 어느 때 저렇게,

속에 든 것 아무것도 없이 굴러다닌 적 있지

그러다가 또 그랬었지

힘 하나 없이 저렇게,

골짜기 속으로 단숨에 추락한 적 있지

비루한 기억들이 초록 풀밭으로 날아 내리고

기억의 바깥세상에는 말떼들이 평화롭다

초원이 수십 번 옷을 갈아입는 동안

내 무기력한 젊음과 비루한 기억들을

세상은 가만가만 바라보고 있었다

뒤안길 야윈 내 청년 하나

천천히 고개를 든다 

 

 

♧ 명자꽃 또 피었네 - 양전형

 

먹기 싫은 밥이야

입 다물고 버티면 그만이지만

세월이란 녀석은 꼭

나이를 먹이고 지나가네

 

차츰 굵어지는 몸매에

또렷한 상처자국들

앙상하게 겨울을 버티더니

이파리 없이 꽃물만 올리더니

 

맨몸마다 활활 피었네

아 이 현기증, 나도 바람나겠네

살포시 열린 빨간 입마다

봄 하나씩 또 먹고 있네 

 

 

♧ 길과 지게차

 

희번덕거리는 운전수 뒤 화물칸에

흰 이를 드러낸 배추 몇 포기

서로 껴안고 뒹구는 사이

새벽이 하늘을 들어 올렸다

길들이 꿈틀거린다

 

길들이 눈을 뜨자마자 소란스럽다

-이 바쁜 시간에 에이 씨팔,

길속에서 욕들이 기어나온다

한길에 나선 지게차를 쳐다보며

욕도 음악인 듯 높낮이가 다양하다

 

지게차가 욕 소리에 땀 뻘뻘 흘린다

길이 힘겹게 지게차를 굴린다

하늘은 차츰 높이 올라가고

날품팔이 하루해는 아직 여백이 넓은데

길은 참, 세상살이가 버겁겠다

 

 

♧ 걸레

 

허튼 생각을 닦아 낸다

염통에서 창궐하여

온몸에 퍼지는 욕심들

 

날마다 걸레로 닦아낸다

 

빨아도 빨아도

점점 헤지고 더러워지는

내 걸레 

 

 

♧ 수박을 먹다

 

와삭!

벌건 몸을

덥석 물어

간과 심장을 도려낸다

식도를 타고 흐르는 청량감

 

내 몸의 발열과 허기를

와사삭!

너도 다 먹는다

내 갈증은 너의 구원에 들었다

 

와삭 와삭!

열정과 이타의 속살을 파먹는다

이렇게 해서

너가 하고 싶은 말들

너의 언어들은 내 것이되었다

순교의 핏물 입가에 흘리며

나는 씨익 웃는다 

 

 

 

♧ 나도 길이다

 

누군가

나를 밟고 가야 할 일이 있다면

나도 길이다

이 사막 같은 세상

누구라도 헤매지 않게

곧고 평평히 드러눕겠다

포도 위엔 돌멩이 하나 없다

숲이 있고 바다가 있고

약간의 바람

때로는 달빛 은은한 나는

누구라도 걷고 싶은 길이다

 

'디카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름오름회 태백산 원정산행  (0) 2014.07.25
연분홍 술패랭이꽃  (0) 2014.07.23
장마 속 참나리  (0) 2014.07.19
무궁화는 피었는데  (0) 2014.07.18
참깨꽃 여린 빛이  (0) 2014.0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