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오름 강좌가 없는 토요일
한라산 둘레길을 걷는 오름 4기 팀과 같이
둘레길 2코스를 걸어 붉은오름을 다녀왔다.
아무런 부담감 없이
장마 속 싱그런 풀숲을 걷노라니
얘기하느라 평소 못 듣던
새소리까지 구별할 수 있었다.
초복이 지난 숲은
이제 푸를 대로 푸르렀고
비가 내려 곳곳에 물이 고여
경관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곳곳에서 휴식할 때
알맞게 준비한 과일과
한 잔의 막걸리는
더 이상 부러워할 것이 없게 한다.
가끔은 이렇게
세상의 모든 짐을 훌훌 털어버리고
어깨 가벼이 숲을 탐해 즐긴다.
♧ 세상이 나를 보고 있네
--목장길에서
늦은 오후가 목장길을 걸어간다
지루한 하루를 다 들이마신 종이컵 하나
바람을 굴리며 길섶으로 들어선다
그랬었지 내 젊음 어느 때 저렇게,
속에 든 것 아무것도 없이 굴러다닌 적 있지
그러다가 또 그랬었지
힘 하나 없이 저렇게,
골짜기 속으로 단숨에 추락한 적 있지
비루한 기억들이 초록 풀밭으로 날아 내리고
기억의 바깥세상에는 말떼들이 평화롭다
초원이 수십 번 옷을 갈아입는 동안
내 무기력한 젊음과 비루한 기억들을
세상은 가만가만 바라보고 있었다
뒤안길 야윈 내 청년 하나
천천히 고개를 든다
♧ 명자꽃 또 피었네 - 양전형
먹기 싫은 밥이야
입 다물고 버티면 그만이지만
세월이란 녀석은 꼭
나이를 먹이고 지나가네
차츰 굵어지는 몸매에
또렷한 상처자국들
앙상하게 겨울을 버티더니
이파리 없이 꽃물만 올리더니
맨몸마다 활활 피었네
아 이 현기증, 나도 바람나겠네
살포시 열린 빨간 입마다
봄 하나씩 또 먹고 있네
♧ 길과 지게차
희번덕거리는 운전수 뒤 화물칸에
흰 이를 드러낸 배추 몇 포기
서로 껴안고 뒹구는 사이
새벽이 하늘을 들어 올렸다
길들이 꿈틀거린다
길들이 눈을 뜨자마자 소란스럽다
-이 바쁜 시간에 에이 씨팔,
길속에서 욕들이 기어나온다
한길에 나선 지게차를 쳐다보며
욕도 음악인 듯 높낮이가 다양하다
지게차가 욕 소리에 땀 뻘뻘 흘린다
길이 힘겹게 지게차를 굴린다
하늘은 차츰 높이 올라가고
날품팔이 하루해는 아직 여백이 넓은데
길은 참, 세상살이가 버겁겠다
♧ 걸레
허튼 생각을 닦아 낸다
염통에서 창궐하여
온몸에 퍼지는 욕심들
날마다 걸레로 닦아낸다
빨아도 빨아도
점점 헤지고 더러워지는
내 걸레
♧ 수박을 먹다
와삭!
벌건 몸을
덥석 물어
간과 심장을 도려낸다
식도를 타고 흐르는 청량감
내 몸의 발열과 허기를
와사삭!
너도 다 먹는다
내 갈증은 너의 구원에 들었다
와삭 와삭!
열정과 이타의 속살을 파먹는다
이렇게 해서
너가 하고 싶은 말들
너의 언어들은 내 것이되었다
순교의 핏물 입가에 흘리며
나는 씨익 웃는다
♧ 나도 길이다
누군가
나를 밟고 가야 할 일이 있다면
나도 길이다
이 사막 같은 세상
누구라도 헤매지 않게
곧고 평평히 드러눕겠다
포도 위엔 돌멩이 하나 없다
숲이 있고 바다가 있고
약간의 바람
때로는 달빛 은은한 나는
누구라도 걷고 싶은 길이다